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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이것저것◀/미술인의작품들

[스크랩] 화가 손상기

왕거미지누 2007. 1. 29. 22:51

불우한 천재화가 손상기

http://www.sonsangki.co.kr/

 

'시들지 않는 꽃'의 꿋꿋함 한눈에 감상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으로 불리는 서양화가 손상기(1949~1988). 서른 아홉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는 천재화가라는 평가에다가 짧고 불우한 생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세 살 때 구루병을 앓아 평생 곱사등을 짊어져야 했던 그에게는 늘 죽음이 가까이 있었고 숙명처럼 가난이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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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3년에 한 번 꼴로 회고전이 열렸지만, 이번은 전작 도록 발간 기념전으로 마련돼 가장 규모가 크다. 생전에 손씨가 전속계약을 맺었던 샘터화랑이 주관, ‘공작도시’ ‘시들지 않는 꽃’ ‘인물 누드’ 연작 등 80년대 유화 150여 점과 고향 여수를 중심으로 지방작가로서 활동하던 초기 유화 소품 50여점, 판화 20여점, 스케치 50여점을 모았다.

 

1979년 여수에서 서울로 올라와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 화실에 자리잡은 손씨는 도심 속 변두리적 삶을 통해 현실 비판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공작도시’ 연작은 빈부의 격차로 파악되는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과 신기루 같은 찰나적 상업문화에 대한 고발로 읽혀진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달동네의 높고 가파른 축대와 계단, 낮은 지붕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경제성장에서 배제된 빈민들의 신산하고 고독한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외로이 어둠을 밝히고 서있는 가로등, 밤하늘 달빛을 가린 도심의 교회 십자가들, 화려한 고층빌딩과 대비를 이루는 난지도도 등장한다. 난지도의 여름을 그린 ‘성하(盛夏)’에서는 여름철 풍경이라면 당연히 등장했을 신록을 찾아볼 수 없다. 고동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와 판잣집들만 눈에 띄고, 늦가을 풍경처럼 고동색을 주조로 을씨년스럽고 옹색하다.


‘시들지 않는 꽃’ 연작은 다분히 반어적이다. 이미 꺾이고 시들어 말라버린 꽃을 통해 더 이상 시들거나 마르지 않고 영원히 가리라는 작가 자신의 의지를 암시하는 작품. 풍경화 ‘자라지 않는 나무’도 자라지 않는 자신의 키와 신체적 불구를 비유하고 있다.


손상기는 자신의 신체적 불구를 비관하는데서 한걸음 나아갔다. 시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토해내기도 했다. ‘명산의 바위처럼 위용 있게 돌출된 가슴뼈/ 외봉 낙타처럼 생긴 등/ 5척에도 못 미치는 키/불쌍하다 가엽다, 그가.’

 

손상기는 누구인가.


만 39세로 요절한 천재 화가 손상기의 작품은 아직 제대로 해석되지 못한 가운데 최근 13주기 추모전을 계기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949년 11월 14일, 전남 여수 출생으로 곱추의 몸으로 만 39세에 천수를 다하고 89년 여수 고향풍경전을 하기 위해 여수 만성리, 방죽포,한산사, 오동도 등을 스케치하는 여행을 하다 작고했다.


손상기는 화가 이전에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전에 반드시 이미지의 집약을 글로써 표현했다.


"나는 글을 쓰고 난 후 그림을 그린다. 느낀 감정과 추상을 정직하고 설득력 있게 기록하여 이미지의 집약을 꾀한다. 나의 이 집약은 회화와 문학의 접근을 의미한다"는 글에서 잘 나타나 있다.


손상기의 작업은 고통스런 현실을 담아내는 피와 땀의 뒤엉킴이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생채기 난 꿈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에서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상실, 이로 말미암은 암흑속에서 고독에 오한을 느끼며 아픔에 신음하는 내면의 언어를 추려내어 가혹하고 엄격한 훈련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고 피력했다.


또한 민중예술을 지향했던 그는 "역사의식이 우선이냐, 미의식이 우선이냐 하지만 한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충실한 작가가 자기 자신의 마음에 찰 작품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제작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역사와 분리되고 미와 구분되겠는가"라며 자신의 미술 세계관을 내비쳤다.


손상기는 대학졸업 이후 '자라지 않는 나무'와 '공작도시'로 자신의 미의식을 진솔하게 담아냈지만 끝내 다음 주제를 형상화하지 못하고 작고하고 말았다.


손상기와 그의 그림과 글에 대해 소개한 책은 '화가 손상기 평전'(박래부 지음, 중앙M&B), '자라지 않는 나무'(샘터아트북), '요절한 문제 작가, 그 천재성의 확인'(인의) 등이 있다

 

 

“서울-공작도시/ 장애물이 많은 도시/ 나에게 서울은 벅차다/ 육교, 지하도, 넓은 건널목 그리고 소음/ 한 겨울에 에이는 추움/ 밀리는 사람들의 표정 없는 얼굴들 모두가…./ 나처럼 생긴 모든 자의 어려움이리라….”(손상기)


그림이 전부 춥다. 허리가 잘린 산,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 어깨를 움츠린 사람들. 도시는 비정하고 암울하다. 달동네 골목길에 햇살이 한줌 떨어지면 허연 담벼락은 검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나무는 끝이 뭉텅 잘려나갔거나 잎새를 모두 떨어뜨린 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다. 뜰 한 구석에 핀 붉은 꽃마저 춥다.

 

 


‘한국의 로트렉’으로 불리던 ‘꼽추화가’, 스스로를 ‘외봉 낙타’라 부르던 ‘요절화가’ 손상기(1949~1988)의 작품이다. 그를 돌아보는 전시 ‘낙타, 사막을 건너다’가 3~12일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다. 생전 손상기를 후원해 온 샘터화랑 엄중구 사장이 앞장서 마련했다. “이번에 작품 600여점을 담은 대형 화집을 냈습니다. 1984년, ‘나는 언제쯤 근사한 화집을 가질 수 있을까’라던 손상기에게 ‘20년 뒤 내가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전남 여수 출신인 손상기는 어려서 병을 앓은 뒤 ‘자라지 않는 나무’가 돼 버렸다. “명산의 바위처럼 위용 있게 돌출된 가슴뼈. 외봉낙타처럼 생긴 등. 5척에도 못 미치는 키. 불쌍타. 가엾다. 그가.”(손상기) 그에겐 그림만이 희망이었다.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해 미대를 나온 뒤 불구의 몸을 이끌고 금호동·성북동·난지도 등을 돌아다니며 맹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런 손상기를 “늘 빨갛게 충혈된 토끼눈을 하고 있었고, 열 걸음 가면 한번 쉬어야 했다”고 지인들은 회상한다

 

치열한 예술혼이 일궈낸 삶 / 존재의 리얼리티

손상기 평전


고충환/미술비평


독자적인 예술혼, 그리고 남달리 치열했던 삶의 근성으로 교직된 긴 그림자를 뒤에 드리운 채 손상기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이제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빈자리에 그의 혼백(흔적)만 남아 세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삶과 자기 내면의 시적 서정성이 일체화된 서정적 현실세계'(원동석), '공작도시 속의 시들지 않는 꽃' (윤범모), 그리고 '다 자란 어둠'(이성부)으로 예술가 손상기, 그리고 인간 손상기에 대해 전하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들에서는 왠지 색바랜 흑백사진처럼 전설의, 신화의 냄새가 묻어난다. 예술과 삶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긴밀하게 교직된 손상기의 삶이 이제는 이러한 말들의 뒤안길에서 전설의, 신화의 천을 직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신화는, 예술에 혼을 판 가난한 예술가, 타협을 모르는 비현실적인 예술가, 아틀리에 칩거하면서 스스로 고립과 단절을 불러들인 소외의 예술가, 이상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힌 자기애의 예술가, 그러면서도 시대의 아픔에 공감한 현실주의 예술가로서 일관되지 않은, 더러는 모순된 예술가상으로서 점철돼 있다. 대개의 신화화된 예술가가 그렇듯이 살아 생전 삶의 상처가 컸던 만큼이나 그 삶은 낭만적, 마술적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무용론이 제기될 만큼 예술의 개념과 생리가 변질된 시대에 손상기가 남긴 어두운 그림자는 삶의 냄새를 자극하고 불러일으킨다. 또한 인간 실존의 심연을 꿰뚫어 보는,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예술의 아우라와 신뢰를 간직한 신화적 예술가상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손상기의 작업은 대략 1979년을 기점으로 고향인 전남 여수를 중심으로 한 시기와, 이후 서울에 상경하여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의 화실에 자리를 잡은 시기(1986년에는 서교동 2층 화실로 옮김)로 구별된다. 이 가운데 손상기의 독특한 화풍을 반영한 본격적인 작업은 아무래도 서울 시절이 될 것이다.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작업은 작가 개인의 개인사적인 서사의 반영이기보다는, 즉 개인적인 삶의 체험에 기초한 것이기보다는 서정성이 짙게 밴 향토주의와 토착주의의 정서가 확인된다. 소재면에서도 과수원이나 시골마을, 해바라기 핀 언덕 등의 전원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대상을, 그리고 고향 여수의 바다와 어시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업은 서울 시절 이후에도 자기 내면의 향수를 자극할 요량으로 간간이 등장한다. 전원이건 바다이건 이런 소재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기보다는 회화적인 문법으로 재구성해낸 점이 특징이다. 부연하자면, 원근법이 소거된 평면적이고 양식화된 화면, 추상적인 면적 구성, 실제보다는 자기 내면에 근거한 중성적인 색채, 소재의 일정한 왜곡과 자의적인 재편집의 과정이 드러나 있다.

여기에 말을 타고 달리는 나체에서 보듯이 다분히 비현실적인 인체 표현을 부가함으로써 목가적이고 향수적인 이상향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일면적으로 이런 이상향의 표현은 실제로는 삶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가 표출된 것으로서, 즉 아이러니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이는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생채기 난 꿈을 실현시켜보려는 욕망"에 돌리고 있는 작가의 노트에서도 확인된다). 나아가 향수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자연과 목가적인 에로스를 경유한 어떤 '원형'적인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실제를 회화적으로 재구성한 이런 이상향의 지향이나 목가적인 서정의 표현은 일종의 구상전 스타일로 정의할 만한 양식적 특징을 낳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본격적인 회화 이력의 초기에 해당하는 1975년 이후부터 88년 폐울혈증 심부전증으로 사망(39세)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구상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나아가 그의 장례를 구상전장(葬)으로 치러진 것에서 보건대 구상전과의 인연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런가하면 개인사적인 서사의 반영으로서 당시 회화의 정형화된 양식적 특징과 다른, 이를테면 이상향의 지향이나 목가적인 서정 표현과는 다른 작품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예컨대 <자라지 않는 나무>(1976년 구상전 입상)와 <고뇌하는 나무>(1979년 구상전 입상)가 그것이다. 두 작품 모두 이상향과는 거리가 먼 작가 개인의 삶의 정체를, 실존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런 자기에 대한 집착은 현실주의 문법에 토대를 둔 서울 시절 이후의 회화에서도 여전히 그 이면을 지배하는 정신적인 원리가 된다. 한 마디로 서울 시절의 회화는 현실주의 문법에 기초한 것으로서 종전의 이상주의의 표현과 비교된다. 당시의 회화는 <공작(工作)도시> 연작과 <시들지 않는 꽃> 연작, 그리고 일련의 <누드> 작업으로 대별되며, 강한 주제 의식의 표출이 특징이다.

 

1979년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 화실에 체류하면서 제작을 시작한 공작도시 연작은 도심의 변두리 삶에 초점을 맞춘 작가의 문명비판론으로 이해된다. 초기에는 주로 당시 지하철 공사의 어수선한 환경을 반영이라도 하듯 공사장 주변에서 발견된 중장비들, 실루엣의 차량들, 신호등, 건설 기자재들, 입간판들, 경고주의 표지판들, 바리케이드 등의 기물을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화면으로 나열한다. 이로써 인간들의 삶의 일부로 침투한 문명의 단면에 대해 일정한 논평을 가하고 있다. 이후 연이은 본격적인 공작도시 연작에서는 더 이상 이런 추상적인 기호의 평면적 나열이 아닌, 실제 풍경에 대한 밀착 취재의 형식을 띠게 된다. 이로써 문명과 인간 본연의 삶과의 충돌을, 심리적인 거리감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어느 경우이건 그림에 등장하는 기물들은 하나같이 작가의 존재를 위협하는, 나아가 도심의 변두리 삶을 위협하는 표식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작가의 작업은 어떤 일관된 전형적인 형상성을 획득한다. 여기서 전형적인 형상성이란 개별적인 사물이 나름의 개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일관된 사상(도심의 변두리 삶에의 문명 비판론)의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성질을 갖는 것을 일컫는다. 이런 전형적인 형상성과 더불어 당시 작가의 작업은 80년대 국내 화단의 한 특징이랄 수 있는 현실주의 미학의 실천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공작도시 연작에서 제시된, 그리고 더러는 당시의 현실주의 미학의 실천과 공유한 작가의 전형적인 형상성으로는, 무엇보다도 높고 가파른 축대를 끼고 도는 높고 가파른 계단, 그리고 구조물과 구조물 사이에 짙게 드리운 긴 그림자의 표현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축대는 그 자체 넘을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삶의 벽을 상징한다. 작가는 노트에서 이런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 개인의 신체적인 사정과 함께 문명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그림자는 마치 유기체적인 생명체를 상기시키는, 혹은 규정할 수 없는 인간 심연을, 심리적 불안을 야기하는 본연적 어둠을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외로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교회의 십자가, 무분별한 개발 탓에 마구 헐 벗겨진 언덕에 난 골을 따라 흐르는 빗물, 도심의 빌딩 숲을 마주하고 있는 난지도의 궁색한 촌락과의 대비, 그리고 리어카 행상의 손에 들려 있는 확성기 따위가 이런 전형적인 형상성을 획득하고 있다.

 

특히 1984년작 <삶터-失>을 보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허공을 배경으로 한 계단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여인의 형상이 여차하면 그 심연의 어둠 속으로 함몰될 것 같은 심정적 불안을 읽게 한다. 또한 1985년작 <도시 속에서>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한 시점의 부감법과(아찔한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일체의 원근과 입체 표현을 배제한 평면적 표현이 특징이며, 도심의 문명과 화해할 수 없는 인간 소외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런가하면 1986년작 <금호동에서>는 가파른 절벽 위에 위치한, 지붕이 야트막한 집들이 마치 절벽 아래의 짙은 어둠 속으로 줄지어 함몰될 듯한 느낌을 준다. 어느 경우이건 삶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변두리 삶에 대한, 인간 실존에 대한 작가의 공감이 느껴진다.

이런 현실로부터 채집된 소재들이 채도가 낮은 짙은 청회색의 표현적이고 멜랑콜리한 색채로서, 덧칠하고 긁어내기를 반복한 마티엘로서, 거침없는 붓질과 나이프 자국으로서 인간 심연의 생채기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시들지 않는 꽃> 연작에 등장하는 꽃은 그 자체 인간 본연의 생명을 상징한 것으로서, 문명과의 부조화를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그저 꽃과 식물을 그린 그림에 '혀와 칼'이라는 상징적인 제목을 부여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한마디로 그의 정물화는 마치 바로크 미술에서 바니타스 곧 인생무상을 상징한 정물화에서처럼 그 자체 심리적이고 심정적인 상징적 암시로써 그려진 것이다. 또한 시들지 않는 꽃은 이런 상징적 표현과 함께 시들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의, 자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최소한의 암시로써 최초의 형체를 간신히 암시하고 있는 차라리 추상에 가까운 그림들에서 이런 반어법적이고 상징적인 자의식의 표출이 확인된다.

 


일련의 누드화는 욕망의 이율배반성을 표현한 것으로 읽혀진다. 이를테면 도심의 삶과 화합할 수 없는 작가의 소외를 상징하는가 하면,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욕망 본연의 배반에 반응한 것이다. '꿈'(추상적인 욕망 본연의 배반을 상징), '쇼윈도'(상품화된 여성과 관음증적 욕망을 상징), '초조'(인간 본연의 불안을 상징), '취녀'(醉女), '끝'(끝내고 싶다?), '望'(잊고 싶다?)에서 보듯 어느 것 하나 의미론적인 맥락을 암시하지 않은 그림이 없다. 이런 의미론적인 맥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익명적인 표현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의 자취가 없이 풍경만으로 제시된다든지, 인체를 표현한 경우에도 뒷모습을 포착한다든지, 짙은 어둠 속에서 세부가 지워진 실루엣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이 흔적이 짙게 배어난다. 어느 경우이건 이런 익명성의 표현은 작가가 지우고 싶은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정신적인 생채기의 반어법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 본질적으로 배반적인 누드에의 욕망은 욕망의 다른 한 버전인 도심의 삶과 화합할 수 없는 작가의 소외를 재현한 것이다.

이런 실제의 재현으로써, 전형적인 형상성의 획득으로써, 그리고 상징적인 문법으로써 작가는 삶의 리어리티를 일궈내고 있다. 이런 리얼리티를 실천 / 실현한 탓에 그는 1983년 서울미술관이 주최한 문제작가전에 선정되기도 한다. 이 이력이 흔히 작가를 현실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있지만, 작가에게서 현실주의는 현실에의 치열한 참여 의식보다는 현실주의 이전의 인간 실존의 심연을 꿰뚫어 봄으로써 삶에의 공감(예술혼의  표출과 별개일 수 없는)이 자연스레 표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현실주의 이전의 자기에의 성향은 다음의 노트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표현하는 것은 꼭 그리지 않으면 안될 필연적인 나의 모습이고, 즉, 상실이 빚은 암흑 속에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며 어떤 것에서 헤어나기 위해 고함지르는 나의 모습인 것, 이런 나의 작업은 곧 하루의 삶을 누린 일기처럼 진실을 포함해야 하는 것. 이 진실의 강한 집착만이 나를 호흡하게 하고 바로 이것이 그려져야 예술이라고 알고 있다."

여기서 예술이 포착해야 할 진실은 작가의 자의식인 것이며, 진실에의 강한 집착은 자의식에의 집착에 다름없다. 자의식에의 집착은 삶의 집착에 다름 아니며, 이런 삶의 집착은 주인을 잃은 빈 베드에 지팡이만 뉘어져 있는 1985년작 <영원한 퇴원>에서 보듯 문명의 배반(공작도시 연작)과 인간 의지의 배반(시들지 않는 꽃 연작), 그리고 욕망의 배반(일련의 누드화)에 이은 삶의 배반이라는 이율배반적인 형태를 띤다. 어쩌면 손상기에게 있어서 예술은 이렇듯 이율배반적인 삶의 정체를 돌파하기 위한 자기와의 간단없는 투쟁의 장이 아니었을까. 손상기로 하여금 시시각각 호흡하게 한 예술 곧 삶의 진실은 현실주의란 말로서는 미처 포섭할 수 없는, 보다 본질적인 지평을 향해 열려 있다.



'그는 붓과 나이프로, 그 자신의 삶을 포함한 모든

우리 시대의 고통받는 삶들을 형상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정겹고 따뜻한 대화를 캔버스 위에

그려 나갔다고 할 경우에도, 그의 그림은 결국 아픔

그것의 덩어리요, 그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그의 그림 앞에 서서 잠시 생각해 보는 모든 사람들도

우리 시대의 아픔을,

미학(美學)을 읽을 것이다.'

-이성부



한계를 넘어선 통찰

손선생!

나는 당신의 그림에

담긴 힘과 그 특이한 감수성에 깊이 감동 받았습니다.

당신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우리 주변의 세계에 대한

이미지는 사물의 궁극성을 친숙할 정도로

꿰뚫어 보는 화가만이 형상화할 수 있는 종류입니다.

예컨대,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외로운 인간의 모습,

여러 갈래 길들이 교차하는 언덕의 음양 속에 거의 파묻힌 듯

아득히 보이는 먼 동네의 모습,

마치 그 잊혀진 동네의 깊은 뿌리인 양 늘어선 앙상한 나뭇가지들.....

그러나, 석양의 찬란함 속에 포착되어

마치 인간이 만든 세속적인 세계를 의연히 넘어서는

듯한 벼랑의 이미지는 사물의 궁극성에 내포된

빛나는 영광이 화가의 눈에 포착되어

존재의 모든 계기로 발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통찰(비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묶여있는 속세의 온갖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던져 줍니다.

당신과 당신의 작품에 영광있기를!!

-스티브 거리거스



긴장으로 승화시킨 자아의식 손상기의 작품은

이러한 언설(言說)에 대해 인용할 수 있는 가능한 예일 것이다.

확실히 그는 자신의 의식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적어가는 고전적인 타입의 화가이긴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보면 그가 회화가 갖추고 있는

하나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이 어느 일정한 수준 이상에 달했을 때,

현실을 보는 화가의 시선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회화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아마도

그 자신은 강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오노이크히코


 

선생님 같이 가요!

손장섭/화가


어느 날인가 손상기가 부탁할 일이 있으니 화실로 찾아오겠다고 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로 말하면 안될까 하고 물었으나

굳이 만나서 이야기하겠다 한다.

무슨 일일까.

신촌에서 만난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 쑥스러운 듯

결혼식 주례 때문이라고 했다.

"원동석 교수님이 계시지 않은가?"

"네 그렇지만…… 그런데 직접 말씀드리기 죄송스러워서요."

"그렇다면 내가 원 선생님을 만나겠네."


맑고 순진한 사람이다.

우리는 별다른 화제 없이 화실로 향해 걷고 있었는데

"선생님 같이 가요!" 하는 소리가 주변 소음과 더불어 멀리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 사이로 "여기요"하는 소리에

아차, 내 걸음걸이가 너무 빨랐구나.


멋쩍어 하면서 나를 본 그는 갑자기 숨이 차 올라 주춤하던 사이에

거리가 멀어졌다고 한다.

졸지에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만 나는 건강치 못한 그를 배려 못했음에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아마도 손상기의 뇌리 속에 박혀 있는 신체적 불구의 한이? 뭉크의 "절규"?처럼

내 고막으로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며칠 후면 샘터화랑 초대전 겸 결혼식 날이어서 나는 원 선생을 수소문,

민예총을 찾았더니 김용태 총장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승패가 여러 번 되풀이돼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한 나는 타판을 내고 말았다.

화가난 원 선생이 "오살놈! 손상기 주례 안해!" 하고 선언하는 바람에

손장섭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서야 "이 썩을 놈아, 손상기는 내가 아끼는

제자님이시다. 알것냐, 오살놈."


<자라지 않는 나무>, <공작도시>, <시들지 않는 꽃>, <사람 내음의 누드> 등

시리고 아프디아픈, 차라리 그의 가슴이고 몸뚱아리를

긁고 찢어서 그려낸 슬픈 영가.

죽음이 새로운 탄생이듯

암울한 환경에서 절규를 끝내고 저 먼 곳에서도

빛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손상기를 기리며.






자라지않는 나무.손상기



                                      사라진 자리에도

                                      그림자로 서 있는

                                      바랜 빛이 있지만

                                      폐품된 이야기를 지우며 간다


                                      어둔망막이 쫓는

                                      형태도 없는

                                      달아나는 저 수천의 표정들

                                      저 금빛으로 나부끼는 손길을 잊어라



                                      단내음 다시 씹어 넘겨도

                                      꺽꺽 울음으로 나오는

                                      빈 화폭에 떨어져 누운

                                      군침의 고함을 들어야한다



                                      피가 엉긴말(言)의 끝

                                      허무의 늪에 꽃힌 뼈

                                      살(肉) 속에 점점이 찍힌 들꽃의 비명이

                                      아직 만나지 않은 적막을 들고 있다



                                      건널목 사이에서

                                      혈관끝에 빛나는 신호등

                                      빛꺼지고 빛 깨어 다스리는 소리

                                      그대는 타오르라 타오르리라

                                      빛나는 별을 보아야한다

출처 : 좋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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