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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2"....2008 황해미술제 "나는 너를 모른다"

왕거미지누 2008. 1. 21. 01:42

아래글들은 인천민미협 게시판에 올린 정정엽님의 글입니다

올해의 황해미술제를 맡아주시기로 했고 열심히 모색중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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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기획 일을 하면서

통신1,2,3,4.......형식으로

그 때 그 때 진행과정과 고민의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활발한 댓글, 비판, 또 공유하고 싶은 글들을 올려주시어

회원님들과 함께 준비하는 황해미술제가 되기를 기대 합니다

 

1월28일 6:00~9:00 정기모임

장소: 구름채

내용: “2008황해미술제”방향 모색을 위하여

6:00 만남, 식사, 농담, 준비

6:30 고창수 첼로 연주

7:00 토론

*외부 큐레이터 소개 (임은제: 부천“계수동이야기”프로젝트 기획자, 홍대미학과)

. 아마추어리즘과 전문성

. 황해미술제 점검(미술제의 의미, 시민문화와 전문영역의 관계, 시민 참여프로그램...)

. 2008황해미술제의 방향 설정

9:00 취중진담 (차는 무료제공, 술값은 각자 부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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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통신의 많은 내용이 개인적 고민일 수 있겠습니다.

그 고민들을 내려놓아 함께 풀어보고 싶어 이번 기획을 맡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정윤희씨가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고 하셨는데

저 역시 책임감보다 설레임이 더 커서 겁 없이 일을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해해주시라 믿고 두서없는 글 풀어갑니다

 

몇 칠 전 한 선배를 만나 좋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 같이 활동하다가 외국에서 고생 징하게 하고 돌아온 선배인데

바깥에서 보니 우리나라가 참으로 이데올로기적이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획자는 프로그래머의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문제해결자로 나서는 순간 인생은 불행해진다는 것,

문제해결자의 눈에는 가는 곳마다 문제가 보여 정작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딜레마에 갇힌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이번 황미제의 주제를 현실의 첨예한 문제에 다가가고자 하니 살짝 걱정이 됩니다.

이 지독한 현실 앞에서 설명과 계몽이 제일 쉬운 방법이지만

그건 이미 예술이 아닌 고로 모두 도망가게 만듭니다.

아흐 예술이 어찌 이 지독한 현실에 밀착될 수 있으려나.....

그러나 이 간극의 절실함, 망설임, 뒤섞임. 고민들.....속에서 창작하기가

곧 예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이번 황미제에서

현실을 정면으로 보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과정은

바로 자신을 잘 들여다보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기위해선 필연적으로 군중과 함께 고독하기 ㅎ ㅎ

이 부분 생각나는 글이 있어 발췌해 올립니다

 

*영감의 세 가지 근원 ; 아틀리에, 자연, 상상

........심상용(동덕여대교수) ------------부분 발췌

 

2. 고독의 절제를 훈계하는 자연

 

작가에게 고독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과의 훼방 없는 밀회를 위해, 그리고 은밀하게 그리워하거나 절망하기 위해 빈 공간으로의 잔류는 절박한 것이다. 정말로 사회적이고자 하는가? 진심으로 시대를 끌어안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오히려 사회와의 접촉을 피하고, 시대의 이면에 머물르라고 미쉘 쉐퍼(Michel Shepper)는 충고한다. 화가는 스스로가 만든 유배지에서만 유일하게 유배당하지 않을 수 있고, 고독을 통해서만 동시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이 길어지고, 자폐가 깊어지면 자신을 만나는 일도 그림을 그리는 일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기'와 '쓰기'는 자신의 상처를 핥기에 여념이 없는 정신으로 다가서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리기와 쓰기는 타인 앞에서 갖게 되는 능력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 앞에 나타나거나 옆을 비켜가고, 뒤에서 머무르고 있는 타인으로 인해 비로소 시작되는 출발인 것이다.

삶을 그려내기 원한다면, 고독으로의 유배는 의미 있는 선택이다. 그러나 삶과의 고리가 완전히 단절되면, 더 이상의 시도 회화와 조각도 존재할 수 없다. 화가 고흐는 고독했으므로, 바로 그 고독이 많은 걸작을 남겼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 조금만이라도 덜 고독할 수 있었다면, 예컨대 헤이그에서 동거했던 창녀 크리스틴 같은 벗의 곁에 조금만 더 오래 머물 수 있었더라면 그토록 일찍 권총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더 많은 걸작을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역시 전혀 근거 없지는 않을 것이다.

 

"고독한 자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먹어치우고, 대중의 틈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먹어치운다. 그러니 이 중 하나를 선택해 보아라."

 

스스로에게 태만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만나는 일은 불가능한가? 그럼에도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정신을 갉아먹지 않으면서도 고독할 수 있고, 그 먹이사슬에 연루되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안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고독은 만남에 의해 절제될 수 있는 병이며, 그리기는 타인에 의해 조절될 수 있는 광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