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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지역공동체 문화만들기 공동체포럼 기고글 -이진우이야기

왕거미지누 2014. 11. 20. 04:51

2014년 지역공동체문화만들기 공동체포럼

일시: 2014년 11월 19일(수) 10:00~18:00

장소: 인천아트플랫폼 H동 2층 

이책자에 기고한 글, 실린글이다


2부섹션이 나와 이선영평론가, 드라마고랑 셋이었고

지금 이야기 하는 이는 사회를 보는 이경복작가이다. 


============책자에 실린 기고글==============================================


동네화가 이진우 이야기

- 20141111일 열우물의 거미화실에서

 

                                                                   이진우

             2010~2011 장봉1리 문화예술마을만들기 기획

                            2002~2014 열우물길프로젝트 기획

 


  

안녕 우리 동네랑 인사한다

집에서 화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동네 풍경들.

우리 동네의  골목길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과 

안녕? 하며 인사를 나눈다

요새는 맑고 투명한 햇살과도 인사를 나눈다 

골목에서 만난 고양이는

안녕? 하고 말을 해도

짐짓 귀찮은 척 모르는 척 

어슬렁거리며 지나간다-식이

 

- 화실 오는 길에

 

 

인천시 부평구 십정1216-118 13/5

199510, 학익초등학교 부근에서 살다가 위번지로 이사를 왔다. 직장이 서울이었기에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기 좀 더 유리한 동네, 동암역 근처로 온 것이었다. 의류프로모션 하던 회사가 논노의 소소라는 브랜드를 프로모션하고 망했는데, 그 뒤로는 서울로 출퇴근할 일은 없었으나 그냥 동네서 계속 살았다.

살던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집의 지하였는데 비탈진 곳의 특징답게 지하임에도 창밖으로 아랫집 지붕이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멀리 윗 열우물이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좋은 지하에서 10년을 살게 되었다. 동네의 대부분의 집들은 아저씨가 일을 하러 다니고 아주머니가 부업을 하는 식이었는데 우리 집 역시 아이들이 어린 까닭에 아내는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하였다. 집 문 밖에는 동네사람들이 주로 몰려 앉아 부업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파전에 막걸리를 같이 마시기도 하고 시간이 나면 골목에 돗자리를 깔고 지냈다.

동네를 돌다가 책을 빌려주는 주민도서관을 만났는데 지역에서 주민사업을 하는 해님방이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해님공부방에서 아이들 미술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공부방 벽에 벽화를 하자고 실무자를 무려 2주간이나 꼬드겨 결국은 벽화를 하게 되었다. 덕분에 공부방이 동네에서 잘 알려지고 아이들도 공부방에 다니는 자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벽화를 중심으로 미술활동(당시에는 마땅한 단어가 없었다)을 같이 할 네 명이 모여 IMF 직후인 19971226거리의미술을 만들기로 하였다.

 

IMF를 겪는 동네

199711, IMF 사태가 벌어졌다. 살던 동네의 많은 아저씨들이 건설이나 토목에서 날일을 하였는데 순식간에 전국에서 건설경기 토목경기가 꽁꽁 얼어 버렸다. 그리고 여기저기 부도가 나고 야반도주도 이어졌다. 우리 집도 집주인이 목공십장이었는데 빚을 지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말았다. 경매로 나온 집도 여러 번의 유찰을 겪다가 결국 도망간 주인 네의 장인 어르신이 들어오면서 일단락이 났다. 뭐 그 장인 또한 빚을 못 받아서 집으로 들어와 사는 것이었으니 해결은 아니었다.

동네는 여러 집에서 사단이 났다. 그간 남자는 출근을 하고 돈을 벌어다 주는 것으로서 가장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었으나 IMF 이후로는 건설경기든 뭐든 다 멈춰진 것이어서 결국 아침부터 동네 수퍼 평상에서 술을 마시고 싸우고, 여자는 음식점의 주방이나 서빙 일을 하게 되면서 가족관계가 깨지는 집들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동네는 점점 휑휑해졌다. 심지어는 이혼했지만 사는 게 그만그만해서 건너편 동네로 이사 갔다는 식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간석 홈플러스가 생기면서 아이들은 홈플러스까지 걸어서 가는 것도 일종의 놀이문화가 되었고, 그사이 동네의 작은 수퍼들은 우수수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재개발이 이집 저집을 머물면서 사람들 머릿속에서 재개발이란 꿈들이 커졌다.

 

십정2지구 주거환경개선지구 1차 지정 및 해제

1997, 살던 동네는 십정2지구 주거환경개선지구 지정이 되었다. 그러나 건설경기는 위축되었고 5년 동안 사업추진을 하지 않아 2002년에 지구지정이 해제 되었다. 재개발을 하자고 하는 순간부터 동네는 순식간에 망가지기 시작했다. 개발이 코앞인데 뭘 고치냐는 심정들이어서 여기저기 물이 세고 금이 가고 부서지고 그랬다. 그러다가 2002년 지구지정이 해제가 되자 가장 심각한 지붕에 비새는 것만 급하게 막느라 많은 집들이 똑같은 파란색 지붕을 갖게 되었다.

2000년 이후로 동네는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 지금의 화실도 마찬가지지만 부동산을 통해서 집을 한번밖에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동네의 집을 사고 일부는 수리요청이 귀찮아서 그냥 집을 비워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동네의 골목길은 겨울이면 한 두군데 얼어터져서 땅을 파는 경우가 있다. 상정초 앞 북향의 비탈진 곳이 특히 그러한데 여긴 햇빛이 들지 않는 골목계단길이고, 그나마 차 다니는 길에서 가까우면 기계장비라도 쓰지만 대체로 함마드릴로 깨고 공사를 하는 일이 많다.

 

열우물길프로젝트는 그냥 시작되었다.

2000벽화를 통한 나눔이라는 이름의 거미동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면서 많은 이들과 만나게 되었다. 많은 이들과의 만남은 2001년 가을에 마을에 벽화를 통해서 활기를 불어넣으면 어떨까 하는 소박한 이야기가 되어 나왔고, 그 이듬해인 2002년 봄에 17곳에 연인원 400명이 참여하는 열우물길프로젝트가 되었다. 처음에는 해님공부방 부근의 몇 개의 집에 벽화를 하려고 했었는데 하고자했던 집들은 반대를 했고 오히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집들이 대거 벽화동의서에 동의를 해주면서 4군데 정도 벽화를 하려던 계획은 가당하지도 않게 일이 커지고 말았다.

우리아이들, 하늘이와 하얀누리가 학교 가는 길가에, 또 해님공부방 아이들이 늘 만나는 동네 골목의 벽에다 벽화를 하려던, 아빠가 너희들 학교 가는 길에 벽화했어, 애들아 이 샘이 공부방 앞 벽화를 했어 어쭙잖게 자랑 좀 하려다가 일은 내 생각보다, 처음 같이 이야기를 했던 네 명의 기대와는 다르게 커지고 말았다. 그래서 벽화동의를 받으러 다니고 벽의 크기를 재고 돈을 구하러 다니고 참여자를 모집하고 그랬는데 교회, 성당, 한의원, 새마을부녀회, 자율방범대, 정육점 등 동네의 많은 곳에서 십시일반 해주셨다. 그리고 동네어르신들도 작은 비용이나마 주시고 음료수도 주셨다. 덕분에 첫 번째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는 열우물길프로젝트가 끝났다.

벽화를 하면 동네가 환해지고 밝아지지 않을까 했었지만 계속 할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가 되자 우리 집은 왜 안 해주냐, 이 골목길에만 하느냐 윗동네는 무시하냐, 벗겨지는데 다시 해주라...등의 요구가 밀려와 결국에는 두 번째, 세 번째 그렇게 매년 하게 되었다.

벽화 이외에도 공부방 아이들과의 미술프로그램도 포함되었고, 사진하는 이들의 동네 사진 전시도, 영상 하는 이들도 참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모임도 생겨 스케치모임을 열었다. 이때 나오는 그림도 전시하고, 영정사진을 찍어드리는 것도 있고 이렇게 열우물길프로젝트는 변화해왔다. 그리고 인천문화재단의 지원금을 세 번은 받아서 책자도 만들게 되었다.

 

십정2지구 주거환경개선지구 2차 지정 및 지장물조사

우여곡절 끝에 동네는 십정2지구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재지정이 되었다. 그래서 201111월경부터 지장물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97%정도로 지장물조사가 완료되었다고 하는데 보통 이정도면 보상협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LH에서는 이윤이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상협의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 부평구와 인천시에서는 LH에 조속한 지구개선사업을 요청하고 있으나 최근에 전국의 LH사업대상지 중에 긴급한 200개 대상에 들지 못하면서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

주거환경개선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동의는 표본조사를 통해서 94%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동네에 빈집에 30%가 넘을 정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살고 있고 여전히 지나다닐 때 언제쯤 개발되냐 물어들 보신다. 글쎄요라고 말하는 게 내 대답이고 살 때까지는 잘 살아 봐야죠하는 게 뒤딸린 말이기는 하다.

11~12월이면 사랑의 연탄은행이나 기업체에서 혹은 인천의 모 대학에서 동네 여러 곳의 골목에 줄을 서서 연탄을 나르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연탄 말고 기름보일러를 쓰는 집에는 기름쿠폰이나 심지어 연탄 한 장도 없다. 연탄은 (홍보용)사진이 되고 기름은 사진이 안되니까. 하여튼 연탄나눔 행사나 연탄배달 행사가 되면 혹시나 내 몫도 있을까 기웃 거리기도 한다. 실은 연탄을 화실 앞에다 쌓아두고 나르는데 나 역시 견탄생심이다. 핑계를 대자면 200장은 배달을 안해준다랄까....~!!

화실이 있는 건물은 예전에 시장이었던 그래서 지금은 구시장으로 불리는 곳의 영미용실자리이다. 이곳에 사시는 동네사람들은 대체로 오랫동안 살아서 서로 끈끈한 이웃인데 거기에 나 또한 있다. 그냥 동네에 페인트도 좀 하는, 벽화도 한다는, 어쩌다가 그림도 전시한다고 하는 그래서 불쑥 전시도록이라고 갖다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화실은 문을 잠그지 않는다, 여름이면 아예 열어두고 사는데 화실안전은 동네사람들이 지켜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거미화실, 나는

동네가 왜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동네를 위한 무슨 거창하고 위대한 담론이나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동네에 있는 화가로서 동네에 좋음 직한 미술을 하는 것이 좋다. 내게 동네는 거대한 그림그리기 좋은 대상이다. 나와 내 이웃이 살고 있기에 내 마음이 가는 풍경이다.

얼마 전 개인전으로 마을에 벽화를 그렸는데 다섯 점의 벽화 중에 화실 앞 친한 두 아버님을 그린 벽화가 전시 이후에 지워지게 되었다. 두 분은 사이좋은 형동생하는 사이셨는데 전에 찍어둔 사진으로 그린다고 허락을 맡고 벽화를 시작했다. 한분 아버님은 이 벽화를 하는 중에는 감독을 하신다고 하고 못생기게 그리면 지워버리겠다고 엄포를 놓고는 하셨다. 그런데 벽화를 하는 중에 벽화 속 왼쪽 아버님이 쓰려지셨고 벽화가 완성된 이틀 만에 소천 하셨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이 두분 아버님이 들어간 벽화에 대해 호평을 해주었다.

앞집 어머님께 돌아가셨는데 계속 벽화로 남게 해도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버님과 평소에 친하기도 했지만 그림 속에 남아 있는 걸 좋아하실 거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벽화가 오랫동안 지속 되겠구나 했는데 오른쪽 아버님께서 지워달라고 요청을 해오셨다. 망자와 같은 그림 속에 있기는 싫다고 하신다. 감독을 맡아 애정을 보여주셨는데해서 이 벽화는 전시가 끝난 직후에 지워졌다.

나의 삶을 통해서 내가 살아온 마을 공간을 이웃으로서 만나고 가슴에 담는, 나와 같이 숨 쉬는 마을의 삶들을, 공간을, 함께 사는 이웃의 이야기. 이들을 시각화시키고 다시 마을에서 전시를 해 이웃들의 삶이, 삶의 공간이, 공간의 작은 모퉁이들이 다만 허물어지고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지고, 버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화실이 있는 건물은 전세계약인데 조건에 재개발될 때까지 전세로 되어있다. , 거미화실은 재개발 될 때까지 동네에 남아 있을 것이고 언제 재개발 될지 모르는 지금에서는 동네에서 즐거이 그리고 사는 게 최선이다.

 

장봉1리 문화예술마을만들기(거리의미술, 기획 이진우)

2010~2011년 장봉1리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다. 20여 가구가 모인 소규모 어촌마을에서 주민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기반으로 벽화, 오브제, 스토리텔링 글쓰기 등을 진행했다. 특히 1차년도 마을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담아 2차년도에는 섬의 이야기를 방파제에 담아내는 작업을 진행해 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을 작업했다.

 

아래의 글은 열우물소식지에 실린 몇 번의 원고와 마을에서의 전시도록 발간사입니다. 열우물마을에서 활동하고 생활하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작성된 에세이들을 함께 공유합니다.

 

6회 이진우 개인전 열우물에서...3’ 전시도록 발간사

여섯 번째 개인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고 벌렁거리네요.(커피부족? 배고파서?) 제 그림에 주요장소로 등장하는 곳, 바로 여기 화실이 있는 우리 동네입니다. 동네의 화가로서 동네를 그려서 기쁘구먼, 더하여 벽화까지 그렸으니 더 더욱 기쁩니다. 우훗, 흐믓!!!!

동네의 여기저기에 그림을 걸어두니 눈에 뜨이지도 않고 작은 느낌이지만 큰그 림으로 벽화도 다섯 점 그려 두었으니 든든합니다. 물론 동네에는 벽화가 엄청 많기는 하지만 ^^

많은 이들이 도움과 지원과 함께 해주어서 전시는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그리고 있음이 기쁩니다. 그리고 동네화가로서 동네에서 전시를 하였고 이를 도록책자로 발간하게 되어 더더욱 기쁩니다. 이 도록책자는 단지 이진우의 여섯 번째 전시만 이야기 하지 않고요, 여섯 번째가 되도록 오는 과정까지 담아서 열우물의 동네화가인 나를 자랑질 하고자 합니다. 별 볼일 없을 지구인이기도 한 나의 자랑질에 제발 급 공감해주시길 당부드려요!! 굽신굽신!!.

 

열우물에서...3’ 전시를 마치며

동네화가인 저의 여섯 번째 개인전을 마쳤습니다. 예전의 다섯번의 전시회가 전시장이라는 장소에서 이루어진 전시였다면 이번에는 벽화라는 방식이 포함된 마을에서의 전시입니다. 덕분에 개인전이라고는 하지만 참여 작가로 루시퍼, 니나노작가도 함께 했습니다.

 

1995년 이 동네에 이사와 살기 시작하였고, 1997년 처음으로 해님방 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2002년 공공미술 열우물길프로젝트를 시작했고, 2011년 동네를 그림으로 그리는 스케치모임을 시작했고, 살던 동안 계속 동네를 그려왔고, 계속 동네에서 벽화를 여럿이 함께 그려왔습니다만.

이번에는 동네를 동네에서 동네에다 그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벽화는 벽화가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동네를 그린 것이 3개나 됩니다. 그래서 바로 그림과 장소에 대한 다시보기, 새롭게 보기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여기 보이죠? 이렇게 말하면 아하~~ 여기네요. 하셔서 더욱 좋습니다.

이 그림들은 동네에 그려진 동네의 모습입니다. 그릴 대상과 그려지는 장소가 같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전시는 102일로 끝났지만 벽화는 동네에 남아 계속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우리 동네를 그린 벽화를 봐주십시오.

 

열우물소식지의 글 2013. 12월호 / [이제는 그냥해요]- 동현비디오에서

동현비디오는 옛 삼아약국 뒷 편에 있고 그 옆에는 영일빵집이 있습니다. 동현비디오는 1997IMF 생기기 6개월 전에 생겨났다고 합니다. 대원강업에서 일을 하시다가 천안공장이 신설되면서 천안으로 가지 않고 퇴직금으로 차렸다고 합니다. 가게가 잘 되었나요 물어보니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초기에 가게를 살리겠다고 전념하셨는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1999년 이후로 인터넷 환경이 좋아지면서 비디오와 도서대여점의 역할이 많이 줄어들었지요.

동현비디오는 늘 이렇게 문이 닫혀있어 보입니다. 왜냐구요? 두 분 다 직장을 다니시기에 오후 4~5시 이후에나 문이 열려서 11시 즈음에 문이 닫힙니다. 아직 많은 만화책이 있고 소설책이 있고 DVD가 있습니다. 한번 들러 보시겠습니까?

다만 가게가 월세가 나가지 않고 아이들도 이제는 바르게 커서 그냥 부업하는 셈치고 하신다고 합니다. 이제는 적응도 됐고 '그냥 해요'라십니다. 큰애는 대학원에 다니다가 지금은 공익요원이며 월급도 적지 않다고 하고 작은애도 스스로 공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살기 편하다. 빚도 없고' 라십니다.

7시경이면 영일빵집에 새 빵이 나옵니다. 새 빵도 사시고 책도 볼 겸해서 동현비디오에 한번 들러보세요!

 

열우물소식지의 글 2014.1~2월호 / [우리 동네는 겨울이 오면 걱정이 많습니다]

우리 동네는 겨울이 오면 걱정이 많습니다. 그 걱정은 다 겨울추위로부터 생깁니다. 눈이 쌓이면 길이 미끄럽습니다. 바로바로 쓸기도 하지만 밤중에 오는 눈은 아침에는 이미 쌓여있기도 합니다. 연탄재를 뿌려도 그 위로 다시 눈이 쌓입니다. 미끄러지면 다치기 쉬운 겨울입니다.

벽이 오래된 벽이다 보니 요즘의 건축물처럼 벽이 추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덜 합니다. 그래서 추위도 또 벽이 결로현상으로 축축하게 젖기도 합니다. 모두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장소도 없어 볕드는 장소에 잠시 볕들 때만 모였다가 바로 들어들 가십니다. 수돗물이 얼까봐 조금씩 흐르게 틀어놓아야 합니다.

연탄은 사랑의 연탄은행이나 기업체에서 후원해주셔서 생기기도 하지만 연탄보일러 아닌 기름보일러는 도시가스보다 비싼 비용으로 난방을 틀어야 합니다. 석유난방비를 후원해주지는 않습니다. 연탄을 나르는 모습은 사진에 찍히고 기름 값을 후원 할 때는 사진 찍을 게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동네는 겨울에는 춥고 불편하지만 무척 멋집니다. 뭐 멋져도 살기 불편하면 그냥 불편한 거지만요. 아직 겨울은 길지만 어서 봄이 오길 기다립니다.

 

열우물소식지의 글 2014. 3월호 / [봄이 오는 시간]

따뜻한 남쪽 고향에서 벽화를 그리다가 다른 일이 있어 인천으로 올라 와 화실로 가는 길, 소방도로를 내려가는 데 우리 동네 어머님들께서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지난겨울에는 주차장 그 자리에 있던 소파도 치워져서 어머님들께서는 길가에 스티로폼 박스를 깔고 쉬시곤 했습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서 반가운 마음으로 이야기합니다.

아따 날씨가 따새져서 다들 나왔는 갑소잉

어디 갔다 오는건가? 날씨가 좋지, 고향에 갔다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바로 들립니다. 화실에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서울 수퍼로 가서 골무과자와 동부과자를 사려고 했는데 동부는 안보여서 꼬깔콘을 사서 다시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님들께 드렸습니다. 아직 날씨가 쌀쌀한 관계로 쿨피스는 드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고향의 군청벽에다 벽화를 그리고 있어서 저녁에는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가서 쉽니다. 고향의 어머니께서도 낮에는 동네에 어머님들과 함께 어느 집에서 같이들 지내십니다. 점심과 저녁을 해서 잡숫고서야 집으로 퇴근하십니다. 고향 동네에서는 그나마 어느 집에 마침 비어서 그 집을 어머님들 사랑방으로 잘 쓰고 계십니다. 뭘 사다드려요 물었더니 골무과자와 동부를 사주라셔 사드린 게 생각나서 오늘도 골무과자를 샀습니다. 4,800원어치 샀을 뿐인데 덕담을 배부르게 많이 해주십니다. 주차장의 저 자리는 바람이 없고 햇빛이 잘 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저기에 소파를 두고 앉아서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시는 게 보기에도 좋고 날씨가 따뜻해져서 다행입니다.

행운할인유통 자리에 그동안 어머님들 경로당으로 쓰고 있다가 은밀하게 위대하게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창고로 쓰고 그 뒤로도 계속 창고로 쓰시다가 이제 다시 경로당으로 쓰일 예정이라고 합니다. 화실에 연탄이 여러 장 남아서 경로당에 갔다 드릴수도 있겠습니다. 경로당이 생기면 날씨가 궂어도 같이 계실 수 있으니 매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