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작업실 삼아 벽화로 예술나눔
이진우 - '거리의 미술' 대표
80년대 이후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영향력과 전시장을 찾아오는 미술애호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전시중심을 탈피, 미술로부터 소외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는 방식 찾기에 대한 고민이 대두된다. 지향점은 엘리트 미술을 벗어나 대중과의 소통 확대와 공공성 부여다.
이에 대한 접근방법으로 벽화를 택한 것이 ‘거리의 미술’이다. 97년이 저물무렵 인천의 현장미술가 몇몇이 뭉쳐 벽화작업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이 도시에서 공공환경미술사업의 기반을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거리 곳곳에 등장한 벽화 대부분은 ‘거리의 미술’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모임을 만들고 10년 가까이 이끌어 온 이가 이진우 작가다. 청년시절 내내 노동현장에서 그리던 걸개그림 대신 이제는 벽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작업을 거치면서 그의 지향점은 차츰 ‘나눔미술’로 고정화된다. 대중들, 특히 소외된 이들을 위해 미술을 함께 나눌수 있도록 판을 벌리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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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실컷 그림을 그릴 양으로 화구를 바리바리 싸들고 고향집에 내려갔습니다. 너른 논이 보이는 다리에 걸터앉아 열심히 자연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그려나갈 때 였습니다. 논에서 열심히 농약을 치시는 아버지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갑자기 아연해졌습니다. 내 그림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비싼 그림을 팔아 도와드려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미쳤지요. 더이상 자연이 아니라, 시대를 담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결심이 서는 순간이었습니다.”
전남 고흥의 한 시골마을 출신인 그는 인근 대도시 광주로 유학, 중·고 시절을 보냈다. 부모의 기대를 접고 대학을 회화과에 진학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어 가능했다.
그런 만큼 입학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날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군대에 갔다. 복학을 하면서 그의 삶은 이전과 180도 달라진다. 앞장서 선배들과 민중미술패를 만들었다.
때마침 6월항쟁이 터진다.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깃발을 그리고 걸개그림을 그리고 만장을 만들었습니다. 사회가 이런 작업을 요구한거지요. 미술이란 홀로 작업실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가방하나 들고 상경한다.
목적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미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선배의 소개로 현장미술운동을 하는 ‘가늠패’에 들어간다. 노동조합 파업 현장지원 등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
때는 노태우 정권말기. 문화예술인 대규모 검거 바람이 몰아친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2년여 징역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를 정리했지요. 결론은 생존이 돼야 창작과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과 함께 아내 고향인 인천에서 정착했다. 현장미술을 하던 작가들이 중심이 돼 인천민족미술인협의회(인미협, 인천민예총 전신)가 꾸려지자 그도 한 몫 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미술을 해야한다는 것은 일관된 나의 목표였습니다. 운동판이 사라진 상황에서 걸개그림은 더이상 요구되지 않았지요. 이 때 떠오른 것이 벽화였습니다. 서민층이 미술관에 가는 일은 평생 한 번이나 될까요. 모든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벽화만큼 적절한 것은 없었습니다.”
벽화작업은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마음이 맞는 작가 4명이 투합, IMF 직후 ‘거리의 미술’이라는 모임을 띄운다.
첫해 활동은 미미했다. 겨우 한건, 그것도 친분 있는 작가 집 담장 작업이었다.
그런데 다음해부턴 사정이 달라졌다. 실업자 구제를 위한 공공근로가 생기면서 그 일환으로 구청에서 벽화그리기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부평도서관 옆 담장 벽화그리기 사업을 ‘거리의 미술’이 맡게됐습니다. 사람들을 끌어모았지요. 이를 시작으로 잇달아 작업을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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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로 벽화 ‘인천의 역사 그림여행 제작’을 비롯, 동양화학 담장, 남구청 담장, 도화가압펌프장 벽화, 강화 계명원 실내 벽화가 모두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힘을 받은 김에 다움카페에 ‘거리의 미술’ 동호회를 개설했다. 일순간 회원들이 늘어났고 제작요청도 쇄도한다.
“도 단위로 지부를 결성했습니다. 저는 서울·인천 지역장을 맡아 운영했습니다. 지역별로 수주를 받아 제작하는 방식을 취했어요. 절정기에는 회원이 3천명을 육박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실업극복국민운동 인천본부와 벽화사업단을 결성, 작업을 해나갔다. 한햇동안 이들이 그려낸 벽화가 수십건에 이른다.
▲‘열우물길’ 프로젝트
부평구 십정동과 연을 맺은 것은 10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해님공부방’에서 자원교사를 하면서 아이들과 주민들, 그리고 마을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곳 역사를 옮겨보면 이렇다. 60년대말과 70년대초 서울과 인천 철거민들이 옮겨와 야트막한 산자락에 동네를 이루었다.
그뒤 주안 수출5, 6공단이 들어서자 노동자 가족이 모여들면서 저소득층 주거밀집지역으로 급작스레 커졌다.
IMF이후엔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됐으나 대한주택공사가 저수익을 이유로 거부함에 따라 개발도 주택보수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민들이 떠나간다.
“골목 옆 다닥다닥 붙은 집들, 형편없는 동네라고 세들기도 꺼려하는 곳 입니다. 몇년전부터 들어서는 고층아파트는 사람들 마음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죠. 그래도 아이들이 뛰어놀고 가진것 없는 주민들이지만 소중한 보금자리입니다.”
이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의욕으로 시작한 것이 ‘벽화가 있는 열우물길’ 프로젝트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동네를 바라보고 벽화를 함께 제작, 서로 마음을 나누면서 활기를 되살리자는 취지다.
2002년 첫발을 내딛었다.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벽화를 그려나갔다.
차츰 아이들이 동네를 찍은 사진전을 더하고 걸개그림도 그려 걸었다. 올해로 어느덧 4회를 맞았다.
지난달 말부터 새로 완성된 벽화와 사진·걸개그림전을 열고 있다.
“동네아이들과 하는 일련의 일들이 이 곳을 잘사는 지역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벽화보단 새는 지붕에 천막을 씌우는 일이 이들에게 더욱 다급한 지도 모릅니다. 개발이 되면 이들 세입자는 또 다른 곳으로 쫓겨가겠지요. 그럼에도 벽화작업이야말로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를 밝게 만들어줄 수 있는 매개라고 생각합니다.”
▲나눔미술 실천
열우물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인천희망그리기’ 카페를 개설했다.
다가가고자 하는 대상을 ‘소외받는 이들’로 구체화했다. 동시에 주요 이슈로 떠오르는, 시대가 요청하는 미술작업에 적극 동참한다는 의지를 더했다.
“가능한 저소득층 밀집지역에서, 혹은 요양원과 복지관 벽화 작업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효순이 미순이 추모미술제’에 동참한다거나 노동문화제에서 역할을 맡는 식이지요.”
카페 회원이 어느덧 9월말 현재 360여명을 넘어섰다.
전문성을 요하는 벽화작업은 ‘거리의 미술’ 회원이, 그 외 여타 행사는 ‘인천희망그리기’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 구조다.
이 작가는 스스로의 미술에 대해 ‘나눔미술’이라고 정의한다. 누구나 누릴수 있는 미술을 만들기 위해 각자 가진 것을 조금씩 내놓고 나누는 과정을 실천하고자 한다.
“나는 그림그리는 재능을 내놓는 것이지요.
결국 함께 하는 판을 벌이는 것이 나의 역할입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도 작가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벽화 그리기는 붓질을 멈추지 않는다.김경수기자 ks@i-today.co.kr
인천신문
i-today@i-today.co.kr
입력: 2006-10-01 22:12:46
이진우 - '거리의 미술' 대표
80년대 이후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영향력과 전시장을 찾아오는 미술애호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전시중심을 탈피, 미술로부터 소외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는 방식 찾기에 대한 고민이 대두된다. 지향점은 엘리트 미술을 벗어나 대중과의 소통 확대와 공공성 부여다.
이에 대한 접근방법으로 벽화를 택한 것이 ‘거리의 미술’이다. 97년이 저물무렵 인천의 현장미술가 몇몇이 뭉쳐 벽화작업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이 도시에서 공공환경미술사업의 기반을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거리 곳곳에 등장한 벽화 대부분은 ‘거리의 미술’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모임을 만들고 10년 가까이 이끌어 온 이가 이진우 작가다. 청년시절 내내 노동현장에서 그리던 걸개그림 대신 이제는 벽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작업을 거치면서 그의 지향점은 차츰 ‘나눔미술’로 고정화된다. 대중들, 특히 소외된 이들을 위해 미술을 함께 나눌수 있도록 판을 벌리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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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실컷 그림을 그릴 양으로 화구를 바리바리 싸들고 고향집에 내려갔습니다. 너른 논이 보이는 다리에 걸터앉아 열심히 자연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그려나갈 때 였습니다. 논에서 열심히 농약을 치시는 아버지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갑자기 아연해졌습니다. 내 그림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비싼 그림을 팔아 도와드려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미쳤지요. 더이상 자연이 아니라, 시대를 담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결심이 서는 순간이었습니다.”
전남 고흥의 한 시골마을 출신인 그는 인근 대도시 광주로 유학, 중·고 시절을 보냈다. 부모의 기대를 접고 대학을 회화과에 진학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어 가능했다.
그런 만큼 입학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날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군대에 갔다. 복학을 하면서 그의 삶은 이전과 180도 달라진다. 앞장서 선배들과 민중미술패를 만들었다.
때마침 6월항쟁이 터진다.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깃발을 그리고 걸개그림을 그리고 만장을 만들었습니다. 사회가 이런 작업을 요구한거지요. 미술이란 홀로 작업실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가방하나 들고 상경한다.
목적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미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선배의 소개로 현장미술운동을 하는 ‘가늠패’에 들어간다. 노동조합 파업 현장지원 등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
때는 노태우 정권말기. 문화예술인 대규모 검거 바람이 몰아친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2년여 징역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를 정리했지요. 결론은 생존이 돼야 창작과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과 함께 아내 고향인 인천에서 정착했다. 현장미술을 하던 작가들이 중심이 돼 인천민족미술인협의회(인미협, 인천민예총 전신)가 꾸려지자 그도 한 몫 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미술을 해야한다는 것은 일관된 나의 목표였습니다. 운동판이 사라진 상황에서 걸개그림은 더이상 요구되지 않았지요. 이 때 떠오른 것이 벽화였습니다. 서민층이 미술관에 가는 일은 평생 한 번이나 될까요. 모든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벽화만큼 적절한 것은 없었습니다.”
벽화작업은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마음이 맞는 작가 4명이 투합, IMF 직후 ‘거리의 미술’이라는 모임을 띄운다.
첫해 활동은 미미했다. 겨우 한건, 그것도 친분 있는 작가 집 담장 작업이었다.
그런데 다음해부턴 사정이 달라졌다. 실업자 구제를 위한 공공근로가 생기면서 그 일환으로 구청에서 벽화그리기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부평도서관 옆 담장 벽화그리기 사업을 ‘거리의 미술’이 맡게됐습니다. 사람들을 끌어모았지요. 이를 시작으로 잇달아 작업을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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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로 벽화 ‘인천의 역사 그림여행 제작’을 비롯, 동양화학 담장, 남구청 담장, 도화가압펌프장 벽화, 강화 계명원 실내 벽화가 모두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힘을 받은 김에 다움카페에 ‘거리의 미술’ 동호회를 개설했다. 일순간 회원들이 늘어났고 제작요청도 쇄도한다.
“도 단위로 지부를 결성했습니다. 저는 서울·인천 지역장을 맡아 운영했습니다. 지역별로 수주를 받아 제작하는 방식을 취했어요. 절정기에는 회원이 3천명을 육박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실업극복국민운동 인천본부와 벽화사업단을 결성, 작업을 해나갔다. 한햇동안 이들이 그려낸 벽화가 수십건에 이른다.
▲‘열우물길’ 프로젝트
부평구 십정동과 연을 맺은 것은 10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해님공부방’에서 자원교사를 하면서 아이들과 주민들, 그리고 마을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곳 역사를 옮겨보면 이렇다. 60년대말과 70년대초 서울과 인천 철거민들이 옮겨와 야트막한 산자락에 동네를 이루었다.
그뒤 주안 수출5, 6공단이 들어서자 노동자 가족이 모여들면서 저소득층 주거밀집지역으로 급작스레 커졌다.
IMF이후엔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됐으나 대한주택공사가 저수익을 이유로 거부함에 따라 개발도 주택보수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민들이 떠나간다.
“골목 옆 다닥다닥 붙은 집들, 형편없는 동네라고 세들기도 꺼려하는 곳 입니다. 몇년전부터 들어서는 고층아파트는 사람들 마음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죠. 그래도 아이들이 뛰어놀고 가진것 없는 주민들이지만 소중한 보금자리입니다.”
이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의욕으로 시작한 것이 ‘벽화가 있는 열우물길’ 프로젝트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동네를 바라보고 벽화를 함께 제작, 서로 마음을 나누면서 활기를 되살리자는 취지다.
2002년 첫발을 내딛었다.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벽화를 그려나갔다.
차츰 아이들이 동네를 찍은 사진전을 더하고 걸개그림도 그려 걸었다. 올해로 어느덧 4회를 맞았다.
지난달 말부터 새로 완성된 벽화와 사진·걸개그림전을 열고 있다.
“동네아이들과 하는 일련의 일들이 이 곳을 잘사는 지역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벽화보단 새는 지붕에 천막을 씌우는 일이 이들에게 더욱 다급한 지도 모릅니다. 개발이 되면 이들 세입자는 또 다른 곳으로 쫓겨가겠지요. 그럼에도 벽화작업이야말로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를 밝게 만들어줄 수 있는 매개라고 생각합니다.”
▲나눔미술 실천
열우물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인천희망그리기’ 카페를 개설했다.
다가가고자 하는 대상을 ‘소외받는 이들’로 구체화했다. 동시에 주요 이슈로 떠오르는, 시대가 요청하는 미술작업에 적극 동참한다는 의지를 더했다.
“가능한 저소득층 밀집지역에서, 혹은 요양원과 복지관 벽화 작업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효순이 미순이 추모미술제’에 동참한다거나 노동문화제에서 역할을 맡는 식이지요.”
카페 회원이 어느덧 9월말 현재 360여명을 넘어섰다.
전문성을 요하는 벽화작업은 ‘거리의 미술’ 회원이, 그 외 여타 행사는 ‘인천희망그리기’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 구조다.
이 작가는 스스로의 미술에 대해 ‘나눔미술’이라고 정의한다. 누구나 누릴수 있는 미술을 만들기 위해 각자 가진 것을 조금씩 내놓고 나누는 과정을 실천하고자 한다.
“나는 그림그리는 재능을 내놓는 것이지요.
결국 함께 하는 판을 벌이는 것이 나의 역할입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도 작가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벽화 그리기는 붓질을 멈추지 않는다.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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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10-01 22: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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