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향이 만난 사람]도시벽화 전문 화가 이진우 씨
그림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경향신문 | 글·사진 김지환기자 | 입력 2009.11.20 05:04
온 몸에 유화물감을 바르고 캔버스 앞에서 고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림에서 손을 놓은 지 수년이 흘렀다. 한때는 이중섭, 반 고흐, 프란시스 베이컨과 같은 광기에 사로잡힌 화가들이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붓 대신 펜을 들고 세상과 소통하는 게 더 익숙해진 듯 싶다.
기자가 화가 이진우씨(46)를 만난 건 아주 단순했다. 순전히 대학시절 전공이 서양화라는 이유 하나였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오히려 기자는 화가를 경계한다. 대학시절은 영화와 음악, 술로 보낸 터라 서양미술사나, 미학 등 전공관련 분야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잘 배운 고교생보다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한 문외한이라면 모를까 오히려 대학시절 전공과 유사한 부류의 사람이라면 오히려 피하고 싶은 게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화가 이진우에게 전시장은 더이상 무의미하다. 산동네 골목길과 학교 담벼락이 모두 그에겐 빛나는 전시장이자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이진우가 인천 도화동 낡은 작업실 옥상에 있는 자신의 벽화그림 앞에 서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맡은 인터뷰를 시작한 탓일까, 이씨를 만나는 길은 헤맴의 연속이었다. "인천대 앞길에서 도화 오거리로 내려오시면 돼요. 1층에 맥주집이 하나 있을 거예요.", "맥주집이요? 안 보이는데요. 벌써 세 바퀴째 돌고 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요."
인천대 앞길에서 20여분을 헤맸을까. 불 꺼진 낡은 간판 위로 희미한 글씨의 맥주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여긴가? 건물은 무너질 것 같은데 어디로 오라는 거지?' 건물 앞에 도착 후 다시 한 번 전화를 해서야 어렵게 찾은 곳은 인천 남구 도화동에 있는 이씨 작업실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맡은 인터뷰를 시작한 탓일까, 이씨를 만나는 길은 헤맴의 연속이었다. "인천대 앞길에서 도화 오거리로 내려오시면 돼요. 1층에 맥주집이 하나 있을 거예요.", "맥주집이요? 안 보이는데요. 벌써 세 바퀴째 돌고 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요."
인천대 앞길에서 20여분을 헤맸을까. 불 꺼진 낡은 간판 위로 희미한 글씨의 맥주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여긴가? 건물은 무너질 것 같은데 어디로 오라는 거지?' 건물 앞에 도착 후 다시 한 번 전화를 해서야 어렵게 찾은 곳은 인천 남구 도화동에 있는 이씨 작업실이었다.
3층까지 오르는 내내 계단 난간 손잡이는 떨어져 나가 위태로웠고 층층마다 텅 빈 공간은 어둡고 컴컴한 할렘가를 연상시켰다. 계단 천장에 달린 자동조명이 그나마 어둠을 가시는 순간 '어솨'라는 대문짝만한 글씨의 연두색깔 문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자 기자를 반긴 건 순박한 시골청년의 얼굴과 미소를 가진 화가 이씨였다. "찾기 힘드셨죠. 고생하셨어요. 제가 그렇게 사회적인 사람이 못 돼서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어? 창문에서 바람이 들어오네요. 우선 신문지로 바람을 막고… 아! 차는 뭐로 드리면 좋을까요?"
거의 다 닳아버린 붓과 벽에 걸린 그림, 어지럽게 널려 있는 이젤들이 대학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한 모양인지 이씨를 만나자 기자는 금세 안도의 한숨이 편안함으로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자 이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릴 만한 게 뭐 있을지 모르겠어요. 말 주변이 없으니 제가 필요하신 자료가 있으면 말씀하세요. 자료 몇 개를 먼저 보여드리며 설명해 드리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여기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자 기자를 반긴 건 순박한 시골청년의 얼굴과 미소를 가진 화가 이씨였다. "찾기 힘드셨죠. 고생하셨어요. 제가 그렇게 사회적인 사람이 못 돼서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어? 창문에서 바람이 들어오네요. 우선 신문지로 바람을 막고… 아! 차는 뭐로 드리면 좋을까요?"
거의 다 닳아버린 붓과 벽에 걸린 그림, 어지럽게 널려 있는 이젤들이 대학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한 모양인지 이씨를 만나자 기자는 금세 안도의 한숨이 편안함으로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자 이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릴 만한 게 뭐 있을지 모르겠어요. 말 주변이 없으니 제가 필요하신 자료가 있으면 말씀하세요. 자료 몇 개를 먼저 보여드리며 설명해 드리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작업실 문앞에 있는 글씨.이씨와 약속을 잡기 전 기자가 먼저 꺼낸 말은 "구도심 골목골목 벽화를 그린다는 얘길 듣고 기사를 쓰려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기자가 도착하기 전 고민하던 차에 몇 가지 자료를 준비해 놓은 모양이다. 이씨가 < 미술로 담는 당신의 생애 > , < 미술로 함께하는 당신의 이야기 > , < 열우물 길의 기억은 ㅇㅇㅇ이다 > 등 다양한 제목이 달린 자료집 몇 권을 꺼내면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자료집을 잠깐 봤는데 벽화만 그리신 게 아닌가 봐요?" 벽화전문 화가라는 타이틀만 기대하고 왔는데 의외였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이씨가 하는 일은 '그림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였다. 재개발·재건축을 앞두고 슬럼화해가는 구도심 골목에 물감으로 나무와 꽃을 심어 놓는가 하면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할아버지들과 고추잠자리, 매미, 벼이삭을 함께 그리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전시요? 작품이 꼭 미술관이나 박물관 벽에 걸린다고 좋은 작품은 아니잖아요. 저는 평범한 사람들 곁에 더 가까이 있고 길거리에 골목에 담벼락에 그려진 꽃 한 송이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화가 이씨의 화두가 '사람'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논과 밭에서 자란 덕분에 이씨의 그림에선 언제나 자연의 따뜻함이 담겨 있다. 특히 고교시절부터 광주에서 지내며 1983년 조선대 회화과를 들어가게 되면서 그의 그림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을 담게 된다.
이씨는 1989년 대학 졸업 후에도 서울에서 사회미술패 민중미술운동연합(이하 민미협) 활동을 계속하며 사람들과 가깝게 다가서기를 계속했다. 특히 그가 해온 도시벽화는 민중을 위한 민중미술을 대변하는 말로 통했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떠나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에 가장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으로 이씨는 벽화를 선택했던 것이다.
물론 80년대 암울했던 시절 역시 이씨를 빗겨나진 않았다. 군 제대 후 등록금 마련을 위해 1987년 인천의 한 사출공장에서 근무한 이씨는 온몸으로 돈을 벌며 이른바 '공돌이' 생활을 겪었다. 80년대 고통의 역사를 관통한 뒤 이씨에게 남은 건 역시 그림이었다. 이씨는 졸업 후에도 서울에서 민미협 사무국장 등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걸개그림과 깃발, 벽화로 사람들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1998년 공장 경험을 인연으로 인천에 다시 내려온 뒤에도 그림은 계속됐다. 공공미술 프로젝트팀 '거리의 미술(http://blog.daum.net/streetart)'을 만들어 벽화제작교실을 연 것은 물론 인천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나 자원봉사센터의 후원을 받아 벽화작업을 넓혀 나갔다. 벽화는 '주민 참여형'으로 누구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붓을 들고 함께했다. "어휴, 처음엔 말도 못했어요. 주민들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이유가 없어요. 그냥 이렇게 살 거니까 내버려 두라는 거에요."
무료로 벽화를 그려주면 누구나 좋아할 거란 생각이 빗나간 건 의외였다. 이씨는 "주위의 관심과 도움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벽화작업에서 가장 힘든 점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씨는 벽화 그리기에 앞서 지금도 주민들에게 일일이 동의서부터 먼저 받는다. 언제 또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이씨는 누구보다 주민들과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다. 수년 동안 노하우를 쌓고 인맥을 만들어온 결과였다. 올 여름엔 남구학산문화원 지원을 받아 < 도화시장 사람들의 세월 > 이란 이름으로 시장 상인들과 함께 그들의 삶과 역사를 그림과 글로 옮겨 기록해 뒀다. 이씨의 노력은 이뿐 아니다. 시민들도 누구나 쉽게 벽화를 그릴 수 있도록 < 벽화 그리기 매뉴얼 > 이라는 책자도 만들었다.
이씨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화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전기기사로 일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최근 이씨가 직장을 그만뒀다. 본격적으로 벽화 등 공공미술에 올인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물론 이씨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얼마 전엔 해마다 공공미술 지원금을 지원해온 한 구자원봉사센터가 정권교체 후 정치적으로 변한 모습에 실망해 '나라 돈은 안 받겠다'며 절연을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난한 화가 이씨 마음은 누구보다 부유하다. 이씨는 현재 '거리의 미술' 활동 외에도 인천 시민회원 500여 명을 두고 '인천희망그리기'란 봉사단체도 꾸리고 있다. 인천 계양경찰서 유치장을 비롯해 골목, 학교 담벼락 등 나눔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찾아가 그림 봉사도 벌인다.
"저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니 행복한 사람이 분명해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무분별한 개발로 무조건 허물기보단 가꾸고 보살피는 노력도 함께해야 한다는 겁니다."
< 글·사진 김지환기자 kjh1010@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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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을 잠깐 봤는데 벽화만 그리신 게 아닌가 봐요?" 벽화전문 화가라는 타이틀만 기대하고 왔는데 의외였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이씨가 하는 일은 '그림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였다. 재개발·재건축을 앞두고 슬럼화해가는 구도심 골목에 물감으로 나무와 꽃을 심어 놓는가 하면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할아버지들과 고추잠자리, 매미, 벼이삭을 함께 그리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전시요? 작품이 꼭 미술관이나 박물관 벽에 걸린다고 좋은 작품은 아니잖아요. 저는 평범한 사람들 곁에 더 가까이 있고 길거리에 골목에 담벼락에 그려진 꽃 한 송이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화가 이씨의 화두가 '사람'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논과 밭에서 자란 덕분에 이씨의 그림에선 언제나 자연의 따뜻함이 담겨 있다. 특히 고교시절부터 광주에서 지내며 1983년 조선대 회화과를 들어가게 되면서 그의 그림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을 담게 된다.
이씨는 1989년 대학 졸업 후에도 서울에서 사회미술패 민중미술운동연합(이하 민미협) 활동을 계속하며 사람들과 가깝게 다가서기를 계속했다. 특히 그가 해온 도시벽화는 민중을 위한 민중미술을 대변하는 말로 통했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떠나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에 가장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으로 이씨는 벽화를 선택했던 것이다.
물론 80년대 암울했던 시절 역시 이씨를 빗겨나진 않았다. 군 제대 후 등록금 마련을 위해 1987년 인천의 한 사출공장에서 근무한 이씨는 온몸으로 돈을 벌며 이른바 '공돌이' 생활을 겪었다. 80년대 고통의 역사를 관통한 뒤 이씨에게 남은 건 역시 그림이었다. 이씨는 졸업 후에도 서울에서 민미협 사무국장 등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걸개그림과 깃발, 벽화로 사람들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1998년 공장 경험을 인연으로 인천에 다시 내려온 뒤에도 그림은 계속됐다. 공공미술 프로젝트팀 '거리의 미술(http://blog.daum.net/streetart)'을 만들어 벽화제작교실을 연 것은 물론 인천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나 자원봉사센터의 후원을 받아 벽화작업을 넓혀 나갔다. 벽화는 '주민 참여형'으로 누구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붓을 들고 함께했다. "어휴, 처음엔 말도 못했어요. 주민들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이유가 없어요. 그냥 이렇게 살 거니까 내버려 두라는 거에요."
무료로 벽화를 그려주면 누구나 좋아할 거란 생각이 빗나간 건 의외였다. 이씨는 "주위의 관심과 도움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벽화작업에서 가장 힘든 점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씨는 벽화 그리기에 앞서 지금도 주민들에게 일일이 동의서부터 먼저 받는다. 언제 또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이씨는 누구보다 주민들과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다. 수년 동안 노하우를 쌓고 인맥을 만들어온 결과였다. 올 여름엔 남구학산문화원 지원을 받아 < 도화시장 사람들의 세월 > 이란 이름으로 시장 상인들과 함께 그들의 삶과 역사를 그림과 글로 옮겨 기록해 뒀다. 이씨의 노력은 이뿐 아니다. 시민들도 누구나 쉽게 벽화를 그릴 수 있도록 < 벽화 그리기 매뉴얼 > 이라는 책자도 만들었다.
이씨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화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전기기사로 일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최근 이씨가 직장을 그만뒀다. 본격적으로 벽화 등 공공미술에 올인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물론 이씨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얼마 전엔 해마다 공공미술 지원금을 지원해온 한 구자원봉사센터가 정권교체 후 정치적으로 변한 모습에 실망해 '나라 돈은 안 받겠다'며 절연을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난한 화가 이씨 마음은 누구보다 부유하다. 이씨는 현재 '거리의 미술' 활동 외에도 인천 시민회원 500여 명을 두고 '인천희망그리기'란 봉사단체도 꾸리고 있다. 인천 계양경찰서 유치장을 비롯해 골목, 학교 담벼락 등 나눔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찾아가 그림 봉사도 벌인다.
"저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니 행복한 사람이 분명해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무분별한 개발로 무조건 허물기보단 가꾸고 보살피는 노력도 함께해야 한다는 겁니다."
< 글·사진 김지환기자 kjh1010@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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