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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도프로젝트- 사진작가 유광식이 담은 장봉1리 사람들

왕거미지누 2011. 10. 24. 16:55

장봉도프로젝트- 사진작가 유광식이 담은 장봉1리 사람들

일시: 2011년 9월~10월

인터뷰 및 사진기록: 유광식

사람들:  (나이순으로) 이재복, 조숙자, 염동진, 허정무, 이정림, 이재철, 김하정

 

 

 

 

 

 

 

 

 

이재복 어르신(87세, 2011)

이재복 어르신(87)은 마을 노인회장님입니다. 세 번을 찾아가서야 만날 수 있었지요. 조상 대대로 사셨는데 장봉을 개척하신 분들입니다. 집 안 역사와 더불어 300년 정도를 아우르시네요. 어르신은 장봉에서 나서 자라신 분으로서 개척 당시 집 안 분들이 옹암해수욕장에 소나무를 심어 해풍을 막았다고 합니다.

전엔 동네에 30채 정도 있었고 5촌이 청년회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가려면 열 두 고개를 넘어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장봉초등학교 1기생입니다. 그때 20명 정도 있었는데 다 돌아가시고 1분만 남았다고 합니다. 지금 장봉초(현 삼목초 장봉분교)는 67회, 68회 정도 될것입니다. 조금 크는 나이가 되니 공출한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였으니 일본군이 공출한다는 이야기에 너나 할 것 없이 부모의 지시에 따라 아내 17살, 어르신 18살 때 중매에 이끌려 결혼을 하였더랬습니다. 화도면 장화리에서 아내를 맞았지요. 당시의 피난민들도 30여 명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기지만 이전에 나무 해다가 불 때고 했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갇히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눈도 안 옵니다. 전에 이장님댁 있던 산기슭이 지금은 깍였는데 안타까워 하시고요. 개도 기르고 닭도 기르고 꿩도 기르고 했는데 어딜 가면 밥 주는 문제로 이후로 짐승은 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딜 나가지 못했단 말이지요. 그리고 옹암해수욕장에 얼음이 얼어서 유빙이 둥둥 떠다녔다고 합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장관이었겠지요.

생활은 좋아져서 좋지만 젊은 사람들도 65세 이상이니 뭐라 할 수 없답니다. 젊은 사람들만이라도 단합해서 일하면 좋겠다 하십니다. 단지 이전에 함께 했던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니 어떤 때는 삶이 비관적이란 생각도 든다며 한편으로 어쩌겠냐 하십니다. 행랑이 40년 정도 되었다는데 같은 맥락을 보여집니다.

얼마 전에 옹진군에서 6·25참전용사 행사가 있었는데 옹진군에서 70명 정도 참가했습니다. 1박2일로 말이지요. 옹진에만 2000명 정도 있었는데 이젠 200명 정도만 남았고 그마저도 80세 이상이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정정하시지만 이재복 어르신(87)은 심장이 약하고 당뇨가 조금 있다면서 심한 일은 못하고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신다고 합니다. 자손들은 진학 문제로 모두 뭍으로 나가 있고 막내딸(혜림원 근무)네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조숙자 어르신(78세, 2011) 

황해도 연백이 고향, 33년생이며 피난민이지요. 6·25동란 끝나고 1.4후퇴(1951년)때 인천으로 피난을 갔다가 이곳으로 온 조숙자 어르신(78)은 5남매 중에 맏딸입니다. 장봉에 들어와 48년 정도 되었습니다. 1.4후퇴때 이북으로 처녀총각을 많이 끌고 가는 바람에 피난을 내려온 것인데 본인만 남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집 안 사람들과 반기는 모습을 상상하며 꿈에 부풀었는데 그게 끝이었습니다.

아들 둘과 딸 둘을 두고 계시는데 큰아들이 어촌계장님입니다. 인천에서 살다가 영감님(인천에서 이발사)이 아파 장봉으로 오게 되었는데 치료도 못 받고 돌아 가신지 35년쯤 됩니다. 예전엔 모두가 가정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와 셋방살이 하면서 영감님 돌아가시고 큰아들 고등학교 마친 후 지금 사시는 집을 손수 지으셨습니다. 그나마도 오래 되었지만 꽤 온전합니다. 형편 때문에 둘째 아들도 중학교까지만 가능했습니다.

큰아들 내외가 배터 앞에서 식당일을 하고 있고 막내딸만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손수 길러 말린 고추를 헝겊으로 닦고 계시던 어르신은 움직임도 좋으셔서 요즘 바다에 나가 굴도 땁니다. 동네 친구분들하고 날씨 좋을 적에 자연산 굴을 따는 것인데 바지락도 많이 난다고 합니다. 내년 3월까지 굴밭이 유지됩니다. 굴을 받는 사람이 있어 인천으로 바로 내보내지고 여기서 번 돈으로 전기요금 정도는 해결하시고요.

이전 동네는 비만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질퍽거렸습니다. 그나마 아스팔트 포장이 된 것이 제작년이었습니다. 쌀가마니를 마당에 내놓고 자도 괜찮았는데 요즘은 타지인들이 고추도 따가고 그런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일가 누가 가져가는 것보다는 마음을 먼저 놓을 수 없으니깐 내놓지 않는다 합니다. 인심이 그만큼 박해졌다면서요. 집 뒤 텃밭(200평 가량)이 있어 배차(배추)도 기르고 고추도 기르고 합니다. 배차는 괜찮은데 고추는 약을 필요로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라서 직접 약을 치기도 하십니다. 가끔 아들이 쳐주기도 하고요.

노인정에 자주 가시는데 할머니들만 30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남자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전에는 노인정에 할머니들이 없었는데 회원 수 맞춰야 한다며 가입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같이 모여 놀고 밥도 해먹고 놀러도 다닙니다. 혈당이 조금 있으셔서 약 먹고 일요일엔 교회도 나갑니다. 그러면서 어머니 얘기를 덧붙여 주시네요.

이전에 부녀회장직을 10년 정도 할 적에 강화 초지로다가 부녀회장 200명(옹진군)이 연수를 갔더랬습니다. 그때 이북서 나온 사람이 강연을 하면서 이북실정을 상세히 얘기해 주더랍니다. 질문을 하기로 고향집이 해안가였는데 안쪽으로 이주시킨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냐는 것이지요. 진짜라고 해서 그때 참 많이 우셨답니다. 25살에 어르신을 낳았으니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현재 100살이 넘었을 것이라며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집에 유난히 신발이 많아 처음 민박 손님이 많은 줄 알았는데 모두 어르신의 작업용 신발이었습니다. 상자에 담긴 수확 고구마도 맛있어 보이네요. 조숙자 어르신(78)이 손수 끊여 주신 믹스커피를 맛나게 마시고 일어섰습니다.

 

염동진 어르신(67세, 2011)

염동진 어르신(67)은 집안 대대로 강화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이 곳 장봉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화에서 왔다고 보면 됩니다. 강화에서 중학교 다니다 인천으로 갔고 1968년도에 장봉 면출장소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통통배가 아니라 사람이 돛배(목선)의 노를 저어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후 서울생활을 마치고 최근에 다시 돌아와 살고 있습니다. 일찍 떠나긴 했어도 면근무를 해서인지 마을사람을 잘 알고 계시답니다.  

장봉의 생활역사는 2~300년 정도입니다. 장봉 1리는 옹암(독바위)지역으로 지금은 바위의 형상이 많이 훼손되어 있습니다. 강한 돌은 아니었고 시루떡처럼 쩍쩍 갈라지는 돌이니 그럴만도 합니다. 당시엔 장봉보다는 강화가 생활권이었다지요. 황보호, 갑제호(1963.2.6. 유빙좌초 사건)가 다니면서 생활권이 인천으로 바뀌었는데 배는 교동에서 외포리-건평-선수-어리정-장봉-선창을 오고 갔습니다. 동막 쪽은 물때에 따라 선착장이 달라지기도 했고요. 

장봉은 옛날 군마를 키우던 관청의 지역이기도 하였습니다. ‘마상 안 모 낸다’ 하던 기억이 있으시다 하는데 군마를 키우면 외주로 나가기 전에 심사를 합니다. 심사에 합격한 말은 도장을 찍는데 그것이 ‘마상’입니다. 말의 역사가 깊은 곳이 장봉이라고 강조하시네요. 장봉의 유래는 최근에 나온 책보다는 이전 출장소에 있던 책에 잘 나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옹암교회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나온 책자가 있다고 일러 주십니다. 또한 왕이 강화에 피신해 있을 적에 만약을 위해 대피할 수 있는 본토가 있다는 설과 공주가 와서 살았다는 설 또한 있는데 확인된바는 없다고 합니다. 

염동진 어르신(67)은 현재 일을 아들에게 물리고 조상 답(땅)도 관리할 겸 장봉에서 작은 창고를 하나 짓고 있습니다. 사람은 늙어서도 힘든 일 벅찬 일 빼고는 꾸준히 일을 해야 건강에 도움이 된다며 멋진 삶을 잇고 계십니다.

 

허정무 어르신(66세, 2011)

허정무 어르신(66)은 7남매 중 장남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동생들을 챙겨 출가시키느라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에 몹시도 찌들어 자식은 많이 낳지 않았는데 아들과 딸 한 명이 있습니다. 당시 산아제한이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였습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등의 선전문구가 많았던 것이지요. 장봉에서 현재 아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유년의 기억은 강화도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위 누님과 함께 오게 된 것인데 19살때였습니다. 1965년이지요. 곧바로 군대 영장 받아 동네에서 5명이 나갔는데 모두 전방이고 본인만 경북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후방이라 외출외박이 잦았었고 근처 동촌유원지(동구 효목동 234-15)라는 곳에 자주 갔더랬습니다.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유혹했습니다. 제대 후 장봉으로 올 줄 알았는데 오지 않아 직접 대구로 가 데릴러 갔고 처가에서는 섬은 안 된다며 반대를 했지만 결국엔 여태까지 함께 하게 되었지요.
당시 시대상황이 김신조 사건(1968년 1월)과 실미도 사건(1968년 4월)때였는데 군대에서 제대를 늦췄습니다. 총 35개월 20일을 하였고 종종 하사계급을 줘서 제대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지긋지긋했지요. 정보 수집이 쉬울 때가 아니어서 실미도 사건조차 당시엔 몰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군대둥이가 가장 좋은 거 같다며 흐뭇해 하십니다. 지금도 가끔 동네에서 만나 술 한 잔도 기울입니다.
장봉은 이전만 해도 전기를 꿈꿀 수 없었습니다. 80년대가 되어서야 들어왔지요. 배도 하루 한 척이면 많았던 것이고 어로보다는 논농사 짓고 건어장에서 생선 말리는 깔판 작업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딱히 기술이 없다보니 뭍으로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고 차차 살만도 하였습니다. 80년부터 84년까지 마을이장을 하였는데 새마을 운동 때문에 할 일이 많았습니다. 경운기도 다니지 못하는 좁은 소로길을 넓히고 청소도 하였습니다. 아들은 부산에 살고 일산에 사는 딸네가 가끔 들릅니다. 큰 볼 일 있을 때야 뭍에 나가고 평소 쉬신다는 어르신은 아내와 함께 혜림원(장봉리 105-1)에서 23년째 근무하고 계십니다. 교통이 문제라며 장봉과 모도가 연결되고 신도가 영종과 연결되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이정임 어르신(63세, 2011)  

이정임 어르신(63)은 전남 순천이 고향입니다. 목포를 거쳐 하인천 근방에서 식당을 했었는데 장봉에 아는 분이 와서 꼬막 양식을 해보면 어떻겠냐며 장봉에 왔는데 순천마냥 뻘이 아닌 모래로 뒤덮혀 있어 잘될 리가 없었답니다. 사업이 안 되어 나가려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금까지 살게 되었다 합니다.

길이 없어 산으로 지게 지고 짐을 나르던 시절이었습니다. 호롱불로 지새우고 어느 정도 지나서는 경운기 머리에 배터리 충전을 시켜 TV를 보았습니다. 해 지면 온 천지가 깜깜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피난민들이 많았는데 지금도 살고 있지요. 그때 바닷물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렸던지 찰싹!찰싹!하는 소리에 맞추어 울었다고 합니다. 시내서 살다 와서 적응이 되어야 말이지요.

농사는 안하고 품 팔며 살았습니다. 배는 모두 객선이었는데 보따리에 생선 실어 2시간이나 되었을까 인천에 가면 다 상하더랍니다. 결빙이라도 있으면 5일 정도는 출발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부지기수(不知其數)였고요. 당시만 해도 연안부두에서 장봉까지 4시간 거리인데 지금이야 정확히 40분입니다.

한 번은 섬에 살기 싫어서 집을 떠나기로 작정합니다. 한 밤 중에 짐을 꾸려 문 밖을 나서려고 하는데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칠듯 하여 단념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직 남편분은 모른다고 하네요. 그땐 젊은 사람이 마을에 많았었는데 중고등 가려면 용유, 영종으로 가야 했기에 장봉을 떠나게 됩니다. 지금이야 좋아졌지만 그땐 정말 살맛도 없고 진짜 싫었는데 인제는 안 떠난다고 합니다.

인천역 부근에 신우가 살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날씨에 막혀 몇 날을 지새야 할 적에는 거기서 머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넓지도 않은 방 딱 하나였는데 12명이 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게 참으로 신기했답니다.

사는 것은 다 똑같다며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길 원하십니다. 노인네들이 노하우는 있지만 시대에 맞게 움직이는게 맞다는 생각에 농사를 짓더라도 과학적으로 체계화 시켜야 하고 인터넷으로 유통구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하십니다. 노인네들 방식이 언제까지나 먹혀 들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농사만으로는 어렵고 기본생활은 자급자족을 하되 관광할 수 있는 기반을 좀 더 다져가야 한다며 땅이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랍니다. 갯벌체험이나 주말농장 확장은 좋은 예입니다. 새로 집 짓는 사람들은 모두가 타지인입니다. 원래 살던 분들은 혜택이 거의 없습니다. 장봉이 살기엔 좋은데 젊은 사람은 없고 학교문제로 자꾸 나가는 형국이니 누굴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초등학교 하나가 평촌(장봉2리)에 있는데 분교격이지요.

이정임 어르신(63)은 부녀회장이자 옹암해수욕장을 끼고 신성민박을 운영합니다. 집 마당에는 100여 종이 넘는 꽃밭이 일구어져 있었습니다. 마음처럼 곱게 피어 있었지요. 다만 장봉의 오래된 포도나무처럼 노령화가 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재철 이장님(57세, 2011) 

옹암해수욕장 앞 토속점을 운영하시는 장봉 1리 이재철 이장님(57)은 강화가 고향이며 출가한 1남 1녀가 있습니다. 팬션 일과 동시에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말을 좋아하여 말 2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처음 집에 두었다가 현재는 혜림원 뒷자락에 옮겨져 있습니다. 거기 직원들은 말 한 마리를 ‘뽀로로’라며 애칭까지 지었습니다.

젊은 시절 많은 일을 하셨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실패도 경험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젠 거칠 것이 없기도 합니다. 마당에 놓인 중급 오토바이만 보더라도 그때의 삶을 대변하는듯 합니다. 현재 2년 임기의 이장직을 하면서 마을을 챙기고 있습니다. 마을벽화가 이뤄지고 있는 장봉1리 1반 지역과 현 거주지인 2반 사이를 오고가며 말이지요.

다들 좋아졌다고 해도 그래도 문제는 교통인가 봅니다. 현재 배편이 하루 12차례 매시간 운행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 운행을 한 업체가 맡고 있음은 문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배 운행을 또 다른 업체에 붙인다면 승객운임을 낮출 수 있고 보다 강화된 서비스를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직접 배를 알아보기까지 하였답니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청소에 관심이 크셨는데 어딜 가도 정돈된 깨끗함을 사람들은 기억하기에 곳곳에 버려진 선구들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강화에서 옮겨와 17년이 되었다는 젊은 이재철 이장님(57)은 무엇보다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거실 한 켠에 드럼이 보이네요. 장봉의 미래에 동행하는 이장님은 본 인터뷰 진행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종합하면 팬션 못지 않은 편안한 인간적 잠자리였습니다. 처음 미지의 장봉이었습니다. 이제는 마음 안에 놓인 장봉이 되었습니다.


김하정 선생님(28세, 2011

김하정 선생님(28)은 혜림원에서 사회복지사로 3년째(2년 10개월) 일하고 있습니다. 충남 공주가 고향이며 아버지, 언니동생 모두 미술을 공부했는데 자신만 미술쪽 유전자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 첫 직장으로 장봉도 혜림원에 발을 디뎠습니다. 시골에 가면 할머니들이 챙겨주시는 것과 같은 분위기라며 장봉도를 ‘고집스럽다’라며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장봉도에는 97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중 혜림원 식구만 150명입니다. 혜림원은 재활원, 요양원, 보호작업장 세 곳으로 이뤄져 있고 지적장애인 중심으로 직원 포함 170여명이 생활하고 있는 곳입니다. 처음 혜림원이 들어설 적엔 마을 사람들과의 심한 마찰도 있었지만 지금은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협동하고 있습니다. 주민분들을 채용하고 경조사와 면민체육대회 등에 직원들이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체육대회에서는 나이 어린 청년직원들 때문에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게 애착이이기도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최선이 아닐까라며 환하게 웃습니다.

장봉은 등산로가 잘 되어 있습니다. 긴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섬이라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높지도 않은 능선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도 좋다고 합니다. 이 또한 외부인을 유인하는 매력이라며 적극 추천을 합니다.

그래도 섬인지라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시내에 그 흔한 떡볶이집과 짜장면집이 없습니다. 이 상황을 선생님은 ‘다이나믹하다’고 표현합니다. 6시 이후 배가 끊기면 괜시리 허해지고 냉동 아닌 생삼겹살 고기가 먹고 싶고 믹스 아닌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고 싶고 병맥주 말고 생맥주 마시고 싶다며 또래 나이격의 솔직한 이야기도 합니다. 자기계발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은 다소 답답한 모양입니다. 섬에 있다는 알 수 없는 고립감은 장봉도의 노을이 정말 좋다며 금새 지워 버리네요. 어휴~

생글생글 밝고 시원한 모습의 김하정 선생님(28)은 인터뷰가 끝나고는 진촌해수욕장에 있는 장봉 4리까지 자동차로 풍경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지나면서 하나 밖에 없는 주유소와 황금빛 논두렁, 자연산 굴, 생전 처음 먹게 된 산낙지까지 제게 무척이나 다이나믹한 시간을 안겨 주었지요. 돌아오는 길 한 손에 굴이 가득한 망이 쥐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