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매체] 상황과 경계(대구교도소) /1994년
1993 / 종이위에 펜, 포토샵, 페인터샵 / 스페이스 빔 -점선면전에 출품전시
2013 / 페인터9.0 -리퀴드브러시
1991년 안양에서 대구로 이감을 갔었다 . 당시 대구교도소는 대전, 광주와 더불어 장기수 교도소였다.
당시에 장기수라면 그야말로 빨갱이로 몰려서 고초를 겪고 계시는 분들이었고 그중에서도 대구교도소는
일제치하 경찰과 같은 이로 상징적인 인물인 안유가 보안과장으로 있었고 그만큼 군사독재시절이었다.
억압 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일상에서는 쓰일일이 없겠지만 그곳에서는 억압이 일상화되어있고
그만큼의 폭력이 모든 곳에 배어 있었다. 공안수 사동(독방)으로 넘어가기 전 일반수와 함께지냈었는데
그곳에는 칠성파(아니 21세기파였나?)가 그곳에는 주요 세력이었다. 내가 있던 방에도 중간보스쯤 되는
이가 있었고 마약제조를 했다고 하는 나이드신 재소자를 형님하면서 대우하고 있었다. 나는 이 형님이랑은
조금 친했고 뭐 그래서 빨개이 빨개이 라고 불리면서 조금은 대접을 받았었다. 저녁에는 정치수들이
샤우팅하는 시간이 있는데 첫날 적응되지 않아 가만 있었더니 창가에 가서 하라고 했었다.
직접 본것은 이것 하나 뿐이지만 폭력이 일상화되어있는 곳이었다.
교도관으로부터 재소자의 폭행은 어떤 식으로든 일상화되어있었다.
폭력조직과 공안수조직이 당시 교도소의 2대조직이지만 대구는 전혀 아니었다. 오직 교도관만이
폭압을 행사 할수 있었다.
이 그림속에는 교도관이 쓰러진 재소자를 들쳐 없고 병사로 가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들었던 조용조용
들었던 이야기로는 맞아서 쓰러졌다고 한다. 충분히 그럴만한 곳이었다.
보안과장 안유의 폭압에 맞서(아, 폭압이라는 단어도 올만에 쓰네 ㅋㅋㅋ) 단식투쟁을 했다가
묶인채 시베리아(징벌사동)로 끌려갔었고 목에서 피가 나오는 바람에 병사로 옮겨갔다.
다들 계속 단식투쟁을 하고 있을때 죽을 먹으며 미안해했던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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