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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리뷰] 명륜동에서 찾다 전

왕거미지누 2006. 4. 26. 21:48

 

 

 

 

 

(도판; 위에서부터)

1. 명륜예술상 펼침막

2. 양주혜, [길밟기]

3. 이진경, [와룡운수 버스 노선도]

4. 워리, [명륜동 소비풍경화]

5. 박우혁, [명륜동.기억], 배너.

6. 박선희, [이천육년 명륜동 유람기]

7. 이종명, [명륜사진관]

8. 양아치, [500-30 명륜 부동산 임대서비스]

/(우)배영환, [나의 아름다운 명진유리가게]

9. 화분이 놓여있는 길/(우) 김을의 구름 무늬가 그려진 마을의 계단.

10. 안규철, [버스정류장/ 계단이정표]

11. 김학량, [암각화]와 [암각서]

12. 이진희, [명륜동 고양이 스미스씨]

13. 김을, [바람계단] / (우) [노을계단]

14. 김을, [하늘계단]

15. 전지, [夜터]

16. 김동환, [마을 다방"쌀"]

17. 윤동구, [화분]

18. 이순종, [아이를 찾습니다]

19. 미닫이, [우리집 이름표]


관련웹싸이트; 접는 미술관 www.collapsiblem.org






명륜동에서 찾다 전

(2006년 2.16--3.31, 명륜 3가 동네 곳곳)


                                      이선영(미술평론가/ 공공미술추진위원회 위원)



 성균관대학교 뒤편에 있는 명륜 3가 동네 곳곳에서 펼쳐진 ‘명륜동에서 찾다’전은 기존의 협소한 미술 및 미술관 개념을 보다 넓은 삶의 장으로 확대시켜 보고자하는 성격을 띈다. 미술 현장에서는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중요한 시도들이 있어왔고, 이러한 경향들이 ‘공공미술’이라는 범주로 자연스럽게 분류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우리의 미술 현실에서 공공미술이라는 용어는, 대기업 사옥 앞의 장식적인 ‘문패 조각’ 등의 진부한 이미지나 미술도 공익성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교조적인 모토가 연상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술가나 대중으로부터 솟아난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힘있는 윗선으로부터 그럭저럭 정해진 추상적인 유형들이 유령처럼 떠돌며 우리의 환경을 더욱 사막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화석화된 질서 아래 껍데기로만 남아있는 개념에 다시금 살을 돋게하고 피가 흐르게 하는 일단의 시도들을 통해, 공공성의 진정한 의미가 채워져야 할 것이다.


‘명륜동에서 찾다’전에서 보여지는 공공성은 어떤 거대하고 당위적이며, 추상적인 개념틀이 아니라, 내용적, 형식적으로 현실의 맥락에 유연하게 맞추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보다 소박한 의미를 가진다. 부제인 ‘Lost in town’에 나타나 있듯, 이 전시를 주최한 ‘접는 미술관’측은 전시가 벌어지는 거리에서 길을 잃을 것을 주문한다. 물론 길을 잃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길을 잃음으로서 또 다른 길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그것은 이 전시가 볼거리가 많은 화려한 시각적 축제나 기념비적인 것을 축조하려는 기획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관객이 투자해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인 노력--그리고 적지 않은 관람료라는 경제적 투자까지 포함--은 스펙터클 중심의 전시보다는 훨씬 더 크다. 동네 여기저기에 숨은그림 찾기처럼 박혀있는 17명의 작가들의 작품들을 주마간산 격으로만 봐도 족히 2시간은 걸리는 대장정이다. 작품이 많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구석구석에 흩어져있기 때문에 동선이 매우 길다. 여기에서 관객은 단순히 수동적인 구경꾼을 넘어, 적극적인 탐사자가 되어야하고, 작가들이 여기저기에 벌여놓은 프로젝트의 참여자가 될 수도 있다. 


이 전시의 매력은 현실의 굴곡면에 밀착하여 전개되는 작품들에 있다. 작품들은 그 자체로 도드라지게 표현되지 않는다. 작품 중에는 버스 정류장이나 길목의 표시, 문패 등 마을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들은 수직성보다는 수평성에, 심층보다는 표면에 머물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점은 전시에 접근하는데 장애 요소가 되기도 한다. 작품을 빠짐없이 보기 위해서는 지도 만으로는 안되고, 동행하는 안내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달이 넘는 전시기간 내내 마을 주민과 접는 미술관 스텝진이 번갈아 가며, 예약받은 관객을 일일이 안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동적으로 소비되는 스펙타클의 거부와 참여의 용이성이라는, 서로 상충되는 요소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앞으로의 공공미술에서도 과제로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씨실과 날실로 이루어진 천처럼 작품과 현실이 서로 두드러짐 없이 직조되어 있는 이 전시의 장점을 가리지는 못한다. 여기에서 현실과 작품은 서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룬다.


심지어는 작품 그자체 보다는, 작품을 본다는 핑계로 구체적인 삶의 공간을 더듬어 보는 행위가 전시의 큰 몫을 차지하기도 한다. 매일 올라다녀야 하는 주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미로같이 이어진 꼬불꼬불한 길과 언덕, 그리고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진 그 동네는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는 장소이다. 굴곡진 표면에, 그러나 단단히 뿌리내린 작품들은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기까지 한데,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예술과 삶의 간단치 않은 관계를 작가들이 나름대로 풀어간 결과이다. 경계가 명확하고 정제된 공간이 아닌, 이처럼 열린 장소에서 전시를 진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리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뿔뿔히 흩어져 있는 심리적인 단절감을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 여기에는 장소에 대한 철저한 연구, 마을사람들과의 소통이 선결되어야 하고, 예기치 못할 파생효과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도 마련되어야 한다. 기획자나 작가는 실험실의 과학자나 책상머리의 몽상가 스타일 보다는, 야전(野戰) 스타일로 변모해야 한다.


삶과 좀더 치열하게 교전해야 하는 작가들로서는 이렇게 막막하게 펼쳐진 장소는 도전의 무대가 될 수도 있다. 이 전시는 일종의 공공미술전이지만, ‘공공성’이라는 거대 담론 보다는 삶과 예술의 길항 관계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 예술은 분명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삶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예술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현실을 괄호치려는 유혹은 존재한다. 삶과 예술을 서로 다른 언어로 파악하고, 예술을 자신만의 자율적인 질서가 지배하는 자족적인 소우주로 간주하려는 유혹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괄호치기는 바람직하지 못한 계층적 질서가 내면화, 제도화 됨으로서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책에 적혀있는 그럴듯한 하나의 사조에 불과하여, 현실 속에서는 착각과 기만 사이에서 번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삶을 위한 예술도 드물었지만, 말 그대로의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형식주의가 실제로 얼마나 가능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아놀드 하우저는 형식주의를 창문 저쪽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주위를 빼앗기지 말고 창유리의 구조에만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으로 비유한 바 있다. 그렇게 될 때 예술작품은 또한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립적 형식체로, 자체 속에 완결된 의미의 집합체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경우 ‘창문을 통해서 내다보는 것’은 언제나 그 내적인 구조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그러나 작가가 스스로 현실의 뿌리를 잘라낼 때 작품의 형식적인 응집력이나 구조적인 완전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예술가는 생체를 싸고 있는 막처럼 개체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내부와 외계 간의 간의 소통의 채널을 구축해야 살아있는 작품을 할 수 있다. 특히 공공의 장에서 작품을 생산 소통시켜야 하는 일은 변화하는 주변과 융통성있게 호흡할 수 있는 강인한 맥락의 창출과 관련된다. 여기에서는 창밖을 보는 것을 넘어서 현실이라는 무대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전시가 이루어지는 명륜 3가는 거미줄처럼 이어진 언덕과 계단길로 구불구불 연결된 장소로 뒷집의 대문 아래에 아랫집의 옥상이 있고, 끊어진 듯한 길 끝에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또다른 샛길이 여기저기로 뻗어있는 곳이다. 대도시에서는 개발에 의해 점차 사라져 어느덧 희귀해진 지형인데, 참여한 작가들은 원래의 상태를 존중하면서 약간의 센스를 발휘하는 것으로 작업을 끝낸다. 일종의 화룡점정 효과라고나 할까. 여기에는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현실과 그것을 작품과 어떻게 연계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긴장감이 없지 않다. 도심에 있으면서도 변두리같고, 몇십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네는 서울이 변하는 주기에 비한다면 느릿한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다. 한가로이 거니는 어르신이 많으면서도, 하숙촌이 밀집한 명실상부한 대학가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동네이다.


관객이 처음 들러야 하는 곳은 마을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한 부동산 가게이다. 부동산 한 켠에 자리한 임시 사무실은 경계가 불확실한 이 거대한 전시장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한다. 부동산 뒷방에는 1994년부터 3년간 학창시절을 이 동네에서 보냈다는 성균관대 95학번 설치미술가 박선희의 [이천육년 명륜동 유람기]가 있다. 인생의 가장 뜨거웠던 시기의 무대가 되어주었을 그 장소는,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전시를 위해 마련한 작은 지도책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계기가 된다. 동네 구석구석의 재미있는 곳을 기록한 작은 책자에서, 작가는 이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관객은 전시를 보기 전에 예습하는 셈치고 박선희의 수제 책자를 볼 수도 있으며, 전시를 보고 와서 복습하는 셈치고 다시금 마을의 언덕배기와 기이한 구석구석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복덕방을 나오면 길거리에 [명륜예술상 플랜카드]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참여 작가들 사진을 커다랗게 출력한 것인데, 주민들과 관람객들이 작가 17명을 대상으로 심사하게 됨을 알리고 있다. 박우혁은 명륜동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만든 플랜카드를 동네 뿐 아니라 대학로와 창경궁로, 율곡로, 종로 등의 길에 가로등 배너의 형태로 걸어놓았다. 플랜카드와 배너 광고물은 그자체로 눈에 띄는 요소이긴 하지만, 거리 자체가 광고물의 거리라서 전체의 일부로 녹아들고 있다. 양주혜와 워리는 모세혈관처럼 돌아가는 삶의 운동을 표현했다. 양주혜는 가파른 고갯길을 운행하는 마을버스에 바코드 문양을 새겨놓았다. 그것은 전통 사회의 지신밟기에서 연원하든 상품 사회의 기호의 체계에서 연원하든 간에, 상호 연결된 긴밀한 순환의 주기를 상징하고 있다. 성균관대 미술학과 출신의 설치미술가 워리는 [명륜동 풍경화 만들기]에서 몇몇 가게의 협조를 얻어 상품 구입시 받는 쿠폰 스티커를 명륜동 지도 위의 자기 주소 위에 붙이게 하였다. 이를 통해 명륜동의 소비 풍경을 패턴화하였다.


이종명, 양아치, 배영환은 마을 진입구 근처의 가게를 이용한 작품을 했다. 이종명의 [명륜사진관]은 전시기간 동안 임대한 공간을 사진관으로 세팅하여 주민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전시하며, 밤에는 쇼윈도에 투사하기도 하였다. 아는 사람 얼굴이 거대하게 투사되어 나오는 이 작품은 그곳을 지나는 주민들에게  매우 강력한 시각적 흡입력을 가질 것으로 생각된다. 양아치는 부동산 가게의 한켠을 빌어 작가의 웹싸이트를 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부동산이라는 임대 사업에 미술 서비스를 추가시킨 것'이다. 배영환은 [나의 아름다운 명진 유리가게]에서 마을 곳곳을 찍은 사진들을 값산 샤슈 액자에 넣어 진열, 판매한다. 유리나 액자가게가 일상에 존재하는 갤러리임에 착안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아무것도 아닌 풍경'도 예술작품이 될 수있음을 주장하는 이 전시의 맥락과 닿아있다.


안규철은 길이 좁아 정류장 표시가 없는 마을 버스 정류장에 표지판을 만들었다. 기준이 없이 눈치껏 줄을 서야하는 불편을 줄여주는 그것은 주민의 필요에 응답하는 쓸모있는 예술작품이다. 모자이크 타일을 박아 만든 9개의 정류장 표식은 전시가 끝나도 반영구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계단 이정표]는 비좁고 가파른 계단들을 오르는 사람을 위해 몇 번째 계단인지 숫자로 알려준다. 그것은 마치 엘리베이터에 LED로 표시되는 층번호와 같은 역할을 한다. 김학량은 주변에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없는 삭막한 정자 주변 콘크리트 벽면에 암각화를 그렸다. 삭막함에 삭막함을 보태자 기이한 효과가 나타난다. 벽면은 화려한 이미지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끊어질 듯 이어질 듯한 선의 흔적 같은 것이 우연히 어떤 모양새를 취한 듯한 형태가 만들어졌다.


전시 공간의 맨 꼭대기에 해당하는 와룡 공원의 보도블럭 위에 새긴 암각서도 확실하게 눈에 띄지 않는다. 매우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어서 주변과 완전히 동화되어 버린 듯한 효과를 준다. 그의 작품이 놓인 공간의 특수성으로 인해, 전시 공간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대폭 확대되었다. 김학량의 작품에서 멋없는 콘크리트 벽은 바위로 간주되고, 콘크리트를 뚫고 자라난듯한 금속의 자생란은 인간에게 제 2의 자연이 된 문명의 일단을 소재로 한다. 성균관 대학교에 재학중인 이진희의 작품 [명륜동 고양이 스미스씨]는 관객이 동네 구석구석에 그려놓은 고양이 그림을 찾는 작품이다. 예기치 않은 장소들에 그려져 있는 고양이 그림을 찾아보면서 새삼 이 동네는 고양이를 위한 동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들이 꽉 막힌 구조가 아니라서 물을 마실 수 있고, 차가 다닐 수 없는 미로같은  골목길은 고양이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


덧붙이자면 고양이가 살기 힘든 곳은 사람도 살기 힘든 곳은 아닐까. 고양이에겐 그들만이 애용하는 길이 따로 있다는 점, 그리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고양이만의 시점 등을 생각해 볼 때 이진희의 작품은 단순한 숨은 그림 찾기 놀이를 벗어나, 이 전시 기획의 의도와 깊이 공명하는 바가 있다. 김을은 길 자체가 계단인 마을의 지형을 캔버스로 삼았다. 156개나 되는 계단에 그려진 구름은 기왕에 오르내려야 할 길에 가벼운 발걸음을 부여하고 있다. 무지개, 구름, 하늘, 노을 같은 제목이 붙은 표지판들은 계단을 애써 다 오른 자만이 볼 수 있는 탁트인 풍경을 위한 작은 기념물이다. 힘을 뺀 김을의 그림 스타일이 현실이라는 맥락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은 역설적인 일이다. 작가는 가끔이라도 이러한 현실의 시험 무대를 통해 검증받을 필요가 있다. 성균관 대학교 미술학과 학생인 전지는 젊은 연인을 위한 장소를 남의 집 옥상 위에 마련했다. 마주보기 보다는 널리 트인 곳을 함께 바라보고, 수다를 떨기보다는 빈 페이지를 같이 채워넣기를 제의하는 낭만적인 작품이다.


김동환의 [마을다방 쌀]은 꼭대기까지 완주한 관객이 내려오는 길에 한 숨 쉴 수 있는 곳이자, 작가와 작가, 작가와 주민, 관객 등이  만날 수 있는 장소이다. 벽에는 주민들의 옛날 사진들이 걸려있어, 서서히 변해온 동네의 시간을 증거하고 있다. 그곳은 동시에 물물교환의 장이 되기도 하고, 작가 이진경이 주민들에게 문패를 만들어주는 공방이 되기도 한다. 물물교환 품목으로 지정된 물건들은 ‘무늬가 있는 알록달록한 천, 털덧버선, 곤충사전, 괘종시계, 채소씨..’등이다. 그것은 예술이라는 것이 본래적으로 선물, 즉 상징적 교환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각을 잘 맞추어 쓴 글은 아니지만, 가독성이 있고 기이한 힘이 배어있는 듯한 이진경의 레터링 작업은 문패 뿐 아니라, 전시 티켓이나 버스 노선표 같은 작업에서도 빛을 발한다. 성균관대 미술학과 학생인 미닫이는 익명적 숫자 대신에, 이야기가 있는 문패를 통해 집에 이름을 부여하려 하였다.


윤동구는 스치로폼으로 만들어진 화분이 유난히 많은 동네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스티로폼 상자를 틀로 하여 견고한 화분을 만들어 마을다방 쌀에 설치하고 판매하였다. 이순종은 마을 다방 근처에 있는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및및한 벽면에 그림을 채워 활기를 부여했다. 전체적으로 전시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에는, 삶에 작품의 뿌리를 두려는 경향의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과 자세한 현장조사를 통해 지역 사회에  밀착되는 작품을 만든 학생팀의 노력이 컷다. 관객으로서는 생활 속에서 미를 찾아보는 감식안이 생겨, 전시를 보고 내려오는 길은 담장에 다닥다닥 붙은 하숙방 광고부터 집집마다 걸린 푸른색 그물망에 삐딱하게 담긴 재활용품까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전시를 진행하면서 쌓은 주민들과의 소통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러한 공공 프로젝트가 일회성의 행사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