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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누네이야기◀/♥지누네 이야기

그때의 오월과 나

왕거미지누 2007. 5. 18. 22:10
80년 오월 광주동신고등학교 1학년 5반 30번이었던 나는
광주의 상황을 전체적으로야 당연 알길이 없었고
그저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고만 믿었다
이미 광주시민의 주검을 많은 사람들이 봤기 때문이었다
비록 내눈으로야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들을 믿을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광주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대앞 굴다리위에서 군인들이 몰려드는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쏜 총알에 맞아 사람이 쓰러지고 
자전거에 탄 대학생들이 그사람을 싣고 가고 
다시 들리는 총소리.....
그날밤은 많은 사람들틈에 몰려다니다가 
광주상고 2학년인가 하던 학생의 자취방에서 여럿이 함께 잤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와서 그 자던 곳이
우리집(사글세살던 집)에서 불과 5분거리도 안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이었지만 내게는 그러한 것에 대한
분노보다는 좀 특별한 감정이 많다
비록 차량이 다니지 않는 서방시장 앞길에서 
평소에는 학교로 가는 시내버스들이 가득했겠지만 
그때의 광주에는 시내버스가 다니질 않았다
할머니와 나는 서방시장으로 갔다
도청과 시청과 조대와 전대를 지키던 군인들이 물러난 다음날인가 되었다
그 넓은 서방시장 앞 도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장은 여전히 시장이었고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열무두단을 사서 할머니와 나는 집으로 왔다 
문화동쪽에서 온 열무와 여러가지 채소들 
비록 광주는 전쟁이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전쟁보다는 해방감이 가득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런 사회성의 공동체의식을 처음갖게하였다

내 개인의 안위보다는 우리모두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중요한 내인생의 전환이었다
내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은 이때와 조대3학년때의 두번인데
해방감에 대한것은 오월이었고
공동체에 대한 모든 것은 87년 조대3학년 2학기를 미대학장실에서
농성하면서 온몸으로 받아들이었다
오월은 많은 분들에게 분노와 눈물이기도 하겠지만
불의가 판치는 것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겠지만
내게는 그 항거이후에 오는 해방감에 대한 소중한 지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