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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집아저씨의 2012 정미소 풍경

왕거미지누 2012. 12. 26. 23:46


 

쌀집아저씨의 2012년 정미소풍경

 

첫 번째 이야기 - 아버지의 은퇴

 

 

올해는 철이 늦어 추수가 좀 늦어졌다. 우리 동네 정현이형은 위탁영농을 하는데 자기 논을 먼저 수확했다. 논 주인들에게 줄 쌀을 미리 찧자고 했다. 경운기 두 대로 가득, 상당히 많은 벼를 싣고 왔다. 쌀집아저씨는 열심히 쌀을 받고 아버지는 기계를 살폈다.

 

쌀을 받느라고 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점심을 먹다가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다. 기계 이상을 보려고 위로 올라가는데 혼자서 올라가지 못하고 정현이형의 부축을 받으며 올라갔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을 들어 올리려고 해도 허리 높이로 올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최 발이 안올라가불더라.”

“그러셨구만요.”

“인자 정미소 일도 다 했는갑다”

“연세가 있는디 당연히 글제라.”

“평생 해왔던 일이라 놓지도 못허고 그랬는디.”

“인제 일도 줄이고 정미소를 어찌할 지 고민해봐야죠.”

“....”

 

아버지는 자존심이 아주 세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집을 이끌어 오셨다. 우리 5형제가 공부를 하고 이렇게 어른으로 자라게 된 것이 모두 아버지의 노력이며 바로 정미소 덕분이다. 이제 지난 40 여년을 해온 정미소 일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아버지께 정미소 일을 줄이자는 얘기를 했지만 막상 많이 줄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정미소가 있고 일을 할 수 있는데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실 거라고 생각한다. 올 가을 정미소 일이 끝나고 겨울 첫 자락에 아버지의 정미소 은퇴식을 해드리고 싶다.

 

2012년 가을 정미소 풍경 첫 번째 얘기는 은퇴를 앞 둔 아버지의 모습이다.

 


두 번째 이야기 - 할머니의 현미

 

지실마을 여든 할머니 이야기다. 화순읍에 들어가는데 버스가 다니는 도로에서 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훨씬 골짜기 안으로 들어 가야 하는 안지실은 20분 이상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허리가 구부정하신 할머니가 혼자서 방아를 찧으러 왔다.

 

“워메 할매 허리도 안 펴짐스로 방아 찌실라고라?”

“찌어야 묵고 살제.”

“근디 현미로 좀 찌어주쇼이.”

“기계가 현미를 못 뽑는디라우.”

“어찌까이 난 필요 웂는디 자석들이 몸에 좋다고 주라고 헌당께라.”

“찧어 드리먼 좋은디 기계가 말을 안 들은께 어쩔 수가 없구만이라.”

“글먼 어쩔 수 없제이.”

 

작은 규모의 벼농사지만 혼자서 짓기는 너무 힘들다고 한다. 자식들이 벼농사를 도와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을 추수를 해서 쌀을 주면 받는다고 한다. 할머니도 이 재미를 보려고 농사를 힘들게 짓고 계신 것이리라.

 

지실마을 구부정 할머니를 보며 자식인 나도 마음이 착잡하다.

 


세 번째 이야기 - 인생의 변화

 

언동 마을은 우리 마을에서 농로길로 1km 남짓 걸어가야 하는 곳이다. 우리 마을에서 가깝기 때문에 우리 정미소에서 방아를 찧는다.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다. 비 예보가 있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후두둑하고 떨어질 것 같다. 방아 찧자고 하는 분도 없다. 바로 그때 전화가 울린다. 언동 마을 할머니다.

 

“나락이 들판에 있는디 비가 올라고헝께 얼릉 갔다 찌어주쇼이.”

“미안시럽구만이라.”

“알겄구만이라 지금 곧 갈라요.”

 

언동 마을 앞 농로길에 나락포대가 놓여져 있다. 열 댓 개가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다. 쌀집아저씨가 나락을 싣는 동안 할머니는 검정색 덕석을 말고 정리를 하신다. 허리가 아프신지 연신 허리를 폈다 두드렸다 하신다.

 

방아를 다 찧었다. 작년보다 많은 쌀이 나왔다. 봄에 모내기 하던 생각이 난다. 산 아래 두 다랑치 논인데 논두렁도 다 허물어지고 정말 심란한 논이었다. 그냥 방치한 논이다. 모내기를 할 모판의 모들도 제대로 자란 녀석들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많이 죽고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모가 부족해 다른 집 모판 남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이만한 수확이 나온 것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댁은 원래 남편이 공무원으로 집안 살림이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일과 결혼으로 떠나고, 이제 할머니 혼자만 남아서 농사를 짓는다. 언동 마을 모내기를 하면서 가장 힘들게 농사를 짓는 분이 아닌가 생각을 했었다. 할머니를 볼 때마다 우리의 긴 인생의 변화를 실감한다.

 

내년에 할머니의 인생에 또 어떤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네 번째 이야기 - 이심전심

 

우리나라 농촌에 젊은 사람이 없어진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젊은 사람이 없어지면서 일손이 줄고, 작업도 기계에 많이 의존한다. 모내기도 위탁영농을 하는 젊은 농부들에게 맡기고 가을걷이와 건조도 건조장에 맡겨 톤백이라는 커다란 가마니에 담는다. 800kg 정도가 들어가는 가마니다. 그렇게 방아도 찧고, 수매도 한다.

 

보상이형 건조장에서 톤백 3개를 실어다 찧었다. 아주머니가 4시 넘어 일이 끝나서 오시면 5시가 넘는다고 했다. 해마다 아저씨가 오셨는데 올해는 아주머니 차지가 되었다. 들어보니 아저씨가 심장병으로 쓰러지셨다고 한다. 방아는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자식이 쌀을 실으러 오기로 했는데 일이 생겨 못 온다고 광주로 쌀을 좀 실어다 달라고 부탁하신다. 이럴 때 참 난감하다. 매일 매일 일이 많기 때문에 광주까지 배달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하고 나면 다음 날 일이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쌀을 배달해 드렸다. 도착하니 아저씨가 맞아 주신다. 환자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술과 담배를 워낙 좋아하시던 활달하신 분이었다.

 

“워메 어쩌다 그러셨다요?”

“긍께 심장이 아파 골로 갈뻔해부렀다야.”

“그래도 이만허시길 다행이구만이라.”

“그라제이.”

“인자 술허고 담배허고 못허시겄네요?”

“술은 참어 부렀는디 담배는 안된다야이.”

“ㅋㅋㅋ”

 

손을 끌다시피해서 커피를 한 잔 주신다. 엊그제 아버지가 병원에서 뇌경색 시술을 하셨다. 회복실에서 기다리는데 이 아주머니를 만났다. 병원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아프시지만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말씀하신다. 아저씨도 아버지도 두 분이 모두 아프셔서 그랬을까. 더욱 반가웠던 것 같다.

 

이심전심이었나 보다

 

  

다섯 번째 이야기 - 할머니의 두 집 살림

 

우리 마을에서 면소재지 방향으로 2km 정도 가면 농소 마을이 나오고 그 마을에서 농로길로 또 2km 정도를 걸어야 나오는 산골 마을이 운곡이다. 팔순의 할머니가 방아를 찧으러 오셨다. 방아를 찧으러 오셨는데 외출복 그대로다. 손에 마대도 없고 어디를 봐도 방아를 찧으러 온 모습이 아니다.

 

“아니 할매 방아 찌러 왔음시로 암것도 없다요?”

“긍께라 나가 집하고 병원하고 두 집 살림을 허다봉께 그렁만이라.”

“좀 성가세도 죽제하고 싸래기는 좀 담아주씨요이.”

“알겄구만이라.”

 

방아를 찧어서 집으로 가져다 드렸다. 할아버지는 탄광을 오래 다니셨는데 진폐에 걸려 병원에 계신다고 한다. 고통 속에서 이제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우리 동면은 화순 탄광이 있는 지역이라서 여기서 일을 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주변에 진폐나 암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정말 많다. 지금도 고통을 받고 아픈 분들도 부지기수다. 한때는 산업역군이라는 이름하에 깊은 굴속으로 들어가 땀을 흘리고 젊음을 바쳤는데 이제는 자신의 목숨과 바꾸고 있는 것이다. 당시 시대상이 그랬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대책이 절실하다. 나오는 길에 할머니는 다시 병원에 가신다고 쌀집아저씨네 트럭을 타고 나오셨다.

 

“그나저나 올해 넘길랑가 몰것구만이라.”

 

 

여섯 번째 이야기 - 비요일

 

가을 추수가 한창이면 정미소도 덩달아 바빠진다.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가을 정미소 일에도 휴일이 있다. 바로 비가 오는 날이다. 비가 조금 와서는 일을 하지만 비가 많이 내리면 일을 할 수 없다. 물론 방아를 찧을 수는 있지만 배달이 안되니 찧지 않고 쉬게 된다. 우리 동면의 “건강미”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썼던 비요일이 되는 것이다. 농촌은 휴일이 따로 없고 비가 오는 날이 휴일이라는 말이다. 참 멋진 작명이다.

 

비요일을 맞아 쌀집아저씨는 정미소 창고 정리를 했다. 서미로 받은 쌀도 제대로 쌓고, 벼도 제 자리에 차곡 차곡 쌓았다. 아마 겨울이 가기 전에 모두 처분하게 될 것이다. 정미소 일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이번에는 택배 준비를 했다. 정미소 일이 바빠지면서 매일 고객들게 보내는 황금눈쌀 택배 작업도 만만치 않다.

 

정미소 일은 몸으로 하는 힘든 일이다. 그러다 보니 비요일의 휴식은 정말 꿀맛 같다.

 

아직 까지 꿀맛 같은 휴식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가을에 쌀집아저씨네 정미소로 오시라.

 

  

일곱 번째 이야기 - 할머니의 부재

 

구수 마을 어르신 이야기다. 여든 중반이신데 아직도 정정하시다. 항상 아들과 손자들과 함께 방아를 찧는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다. 할아버지 집은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에 있다. 그래서 방아를 찧을 때도 집 뒷 골목에 벼를 일일이 내놓는다. 방아를 찧어서도 다시 그곳에 쌀을 내린다. 그러면 시간을 들여 다시 집 창고로 나르는 수고를 하신다.

 

“할머니가 안뵈시네요?”

“잉 그려 병원에 있당만.”

“많이 아프신가요?”

“오늘 낼 허시.”

“그러시구만이라.”

 

며칠이 지나 다시 구수 마을 다른 어르신 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을 들었다. 어르신이 서둘러 방아를 찧으려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제는 기억속의 할머니로 남았다.

 

“할머니 편히 쉬세요.”

 

  

여덟 번째 이야기 - 줄다리기

 

마을 뒷산에 차나무가 있어 마을 이름이 다산이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 할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마을 도로 옆에 나락을 말려 담아 놓았다고 하신다. 얼른 가서 싣고 왔다. 많지 않은 양이다. 며느리와 손자가 방아를 찧으러 왔다. 방아를 다 찧고 나니 이번에는 아들이 왔다. 아들은 일하다 말고 어머니의 호출을 받고 급하게 왔다고 한다.

 

“아따 허시지 마랑께라이.”

“안허먼 쓴다냐 왕겨도 담아야된디.”

“왕겨는 뭐할라고라?”

“내년에도 농사 해야제.”

“워메 내년에도 허실라고라.”

“암만...”

 

작년에도 봤던 모자간의 줄다리기다. 그래도 줄다리기를 할 수 있는 모자가 있어 다행이다. 농사를 지어 자식을 주고 싶어 하는 어머니가 있어 다행이고, 어머니의 호출에 급히 달려 올 수 있는 아들이 있어 다행이다.

 

해마다 농촌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아홉 번째 이야기 - 아는 지 모르는 지

 

구수 마을 방아를 찧었다. 대문으로 들어가 마당 한 쪽에 벼를 이쁘게 쌓아 놓았다. 이 ㅇ르신은 회갑은 지났지만 상당히 건강하신 분이었는데 올해는 힘을 못 쓰신다.

 

“어디 아프시당가요?”

“손을 좀 다쳐부렀네.”

“어쩌다가요?”

“일하다 미끄러짐스로 손을 짚어부렀는디 인대가 갔당만.”

 "조심해야 쓰겄구만이라.”

 

방아를 찧어서 다시 집으로 가지고 왔다. 집 뒤쪽으로 소 외양간이 있다. 왕겨와 쌀겨를 내리러 외양간 앞으로 갔다. 한우가 열 댓 마리 보인다.

 

“소는 어떤가요?”

“요즘 같애선 사료값 허기도 힘들구만.”

“그래요?”

“우리처럼 작게 허는 사람도 묵고 살아야 되는디...”

 

농촌에 대농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농은 얼마 되지 않고 소농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책은 일정 규모를 갖춘 대농에 맞춰져 있다. 대기업이 크고 튼튼해도 결국은 중소기업이 받쳐주지 못하는 구조는 모래성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혜택이 소수에게만 돌아가면 결국 많은 국민들과는 관계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ㅈ정책이 공업과 더불어 농업을 살리고, 대기업과 더불어 중소기업을 살리는 방향이 될 수는 없을까? 쌀집아저씨도 생각하는 이런 것들을 높은 양반들이 모를리는 없을 테고...

 

윗 사람들은 아는 지 모르는 지.

 

  

열 번째 이야기 - 다산 구부정 할머니

 

다산 마을 구부정 할머니 얘기다. 올해도 어김없이 방아를 찧으셨다. 하지만 올해는 방아를 찧으러 정미소에 따라 오지 않으셨다. 작년 가을에 방아를 찧으면서 앞으로 자신이 없어도 아들 방아 잘 찧어달라고 부탁하셨던 분이다. 할머니 예감이 틀린 덕분에 올해도 뵐 수 있었다.

 

“잘 계셨지라?”

“글제라.”

“건강허신게라?”

“죽다가 살아왔소 병원에 오래 있었당께라.”

“그래도 다행이구만이라.“

”왕겨는 안가꼬올라요.“

“아니 왜요?”

“인자 농사도 못 허겄소.”

“그러시구만이라.”

 

다산 마을이 화순읍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이라 자주 할머니를 보게 된다. 냇가 옆에 있는 밭에서 할머니를 자주 본다. 일을 하고 계신다. 이제 정말 할머니 말씀대로 구부정 할머니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다.

 

이렇게 세월이 사람을 지나쳐 가는 것 같다.

 

  

열 한 번째 이야기 - 옥림의 울력

 

옥림 마을로 갔다. 두 집 방아를 찧었다. 두 할머니가 서로 도우며 울력을 한다. 아직까지 옥림에는 이런 훈훈한 모습이 남아있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마을이다. 쌀집아저씨네 정미소 벽화와 황금눈쌀 포장지에 들어가 있는 정미소풍경이란 시도 이 옥림 마을과 어르신이 주인공이다.

 

“수확이 어떤가요?”

“안좋구만이라.“

“그래요?”

“논 한 다랑치는 천수답이라 물이 없어 통 주거리다요.”

“어쩌까요.”

“매상도 못허고 그냥 찧어서 묵어야제라.”

“배추도 뽑아 놓으셨네요?”

“지난 주말에 자석들이 와서 해주고 갔제 인자 자석들 없이는 암것도 못허겄소.”

 

작년까지만 해도 자식들과 함께 일을 하시던 분들이었는데 이제 할아버지는 일을 완전히 놓으셨고 할머니는 너무 힘들어 하신다. 어르신들도 힘들고, 아버지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이제 정미소 일을 어찌할고.

 

그래도 따뜻한 옥림의 울력이다.

 

 

열 두 번째 이야기 - 부지런쟁이 이장님

 

우리 마을 옆 집 언동 마을. 이장님이 젊은 분이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두 분 중 한 분이다. 그리고 정말 부지런하다. 벼농사도 많이 하시고 밭농사도 많다. 그런데 가을이 되기 전에 갑상선 암수술을 받으셨다.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해마다 가을이면 트럭 두 대로 벼를 싣고 와서 방아를 찧는다. 올해는 몸이 아파 병원에 계서서 아주머니와 아들이 함께 왔다. 다른 해 같으면 직접 오셔서 왕겨도 담고 할텐데 올해는 왕겨도 담지 않고 쌀과 쌀겨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

 

방아를 다 찧어 가는데 이장님이 오셨다. 그냥 병원에 누워 있을 성격이 아닌 것이다.

 

“아니 멀라고 오셨답니까?”

“허허 그래도 와 봐야제.”

“안 오셔도 잘 찧어 드릴 것인디.”

“보고 배달해야제.”

 

방아를 다 찧으니 트럭을 몰고 이장님 형제들한테 배달을 가신다. 농촌에 젊은 농부가 있는 것은 복이다. 마을도 그렇고 어르신들도 그렇고. 암 수술을 하셨으니 다시 건강해지길 바란다.

 

이장님 어서 들로 나오세요.

 

 

열 세번째 이야기 - 기차화통 할매의 용돈

 

찰동마을 기차 화통 할머니 방아를 찧었다. 찰동 건조장에서 하루 전 날 벼를 실어왔다. 스무 개 남짓. 다음 날 일찍 할머니가 버스를 타고 오셨다.

 

“안 오셔도 잘 찧어 갖다 드릴 것인디요.”

“그래도 보고 시퍼서 왔제.”

“건강하신게라?”

“인자 심이 부쳐 못도 못허것소.”

“그러시구만이라.”

“올해는 쌀만 가져갈라요.”

“아니 그럼 밭농사 안허시게라?”

“심이 없어 닫아불라요.”

 

방아를 찧어서 할머니 집으로 가지고 갔다. 할머니는 1년 드실 쌀을 뒷 뜰 커다란 통에 부으신다. 쌀통에 부어 드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입에 달고 계신다. 나오는 길에 고맙다고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만원도 주신다. 함께 일하는 분과 함께 빵과 우유를 사 먹었다.

 

기차화통 할매 건겅허시씨요이.

 

 

열 네 번째 이야기 - 귀농 한탄

 

한참 방아를 찧고 있는데 그랜져 한 대가 정미소 앞에 선다. 모습을 보니 오도미 아저씨다. 광주에서 살다가 귀농한 분이다. 방아를 찧고 싶다고 하신다. 한 시간 뒤에 실으러 가겠다고 했다. 집에 도착해서 벼를 실었다. 양이 작년보다 훨씬 적어 보인다.

 

“농사를 잘 못 지으셨는갑는디요?”

“말도 마씨요.”

“워째요?”

“작년하고 비교해서 반이나 떨어져 부렀소.”

“하하하.”

“나가 그냥 편히 살 것인디 괜히 시골에 들어와가꼬.”

“요즘은 미쳤다고 생각허고 있소.”

“시골일이 돈도 안되고 힘들제라.”

“생각하고 완전 딴판이구만이라.”

 

우리 면에는 귀농한 분들이 많지 않다. 농토도 넓지 않고 농사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귀농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은 발전 가능성이 충분한 블루오션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귀농해서 농업으로 성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일한 만큼 행복해 질 수 있는 곳이 농촌이었으면 좋겠다.

 

  

열 다섯 번째 이야기 - 첫 경험

 

지실 마을 방아를 찧었다. 며칠 전부터 화순읍에 있는 건조장에 톤백이 두 개 있다고 꼭 좀 찧어달라고 부탁을 하셨던 분이다. 외모로 봐서는 농사와는 거리가 먼 회사원으로 보이는 분이다. 짬이 생겨 벼를 싣고 왔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함께 왔다.

 

“농사 잘 지으셨는게라?”

“아이고 말도 마시요이.”

“왜 그러신당가요?”

“공직에서 퇴직허고 첨 해봤는디 허허허.”

“어쩌시덩가요?“

”풀 세 번 뽑고 넉다운 되야부렀소.“

”그러셧구만이라.“

”약을 안헝게 좋긴 헌디 무농약이나 유기농이 너무 힘들구만이라.“

”당연히 그러시제라.“

 

방아를 찧어서 산 중턱에 있는 집으로 갖다 드렸다. 작고 아담한 별장을 지어 놓으신 것 같다. 그래도 겨울에 산 중턱 마당에서 아래 논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편안함이 있어 좋을 것 같다.

 

첫 농사 고생하셨습니다. ^^

 

 

열 여섯 번째 이야기 - 불안한 동거

 

구수 마을 어르신 얘기다. 아버지와 한 살 차이라서 두 분이 말씀도 많이 나누고 그러신다. 이 어르신은 항상 일요일에 자식들과 함께 방아를 찧는다. 마을 농사도 짓다보니 양도 좀 된다. 그런데 연세가 있으니 방아를 찧을 때는 자식들의 도움을 받는 것 같다. 그래도 항상 아들 하나나 둘이 곁에서 도와가며 방아를 찧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아들들은 초등학교 후배라서 좀 편하기도 하다.

 

“아버지 도와줄라고 왔구만?”

“그래야제라.”

“인자 아버지도 연세가 많은디.”

“긍께요 좀 줄이셔야 하는디 계속 허신당만요.”

“기계가 위험하기도 하고 힘이 부치실 것인디.”

“그래도 아직은 허시것다고 헝게 그냥 보고 조금씩 도와드리고 있구만요.”

 

아들과 얘기를 하다 보니 아직 정미소를 하고 있는 아버지 생각이 난다. 일로 보면 정미소 일이 농사보다 훨씬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두 분이 연세도 비슷하고. 그래도 이 어르신은 아들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에 일이 가능한 것 같다. 길지는 않지만 현재를 버틸 힘이 있고 자식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농사가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불안정한 농사가 길어질 수는 없다. 우리 농촌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불안한 동거가 아닌 아름다운 동거는 없을까.

 

 

열 일곱 번째 이야기 - 오도 가도 못하고

 

자포 마을 할머니 방아를 찧었다. 올해 여든.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농사를 지으셨다.

 

“또 농사 지으셨능게라 고만 허시제?”

“시골에 삼스러 요것이라도 해야제.”

“어찌 헐만 허신게라?”

“아이고 죽겄소 너무 심이 등만이라.”

“올해는 농사도 줄렸당께라.”

“그래야제라.”

“자석들은 도시로 오라고 허는디 갑갑해서 못가제.”

“긍께요 부모님들이 다 그러시제라.”

“시골서는 살아야 쓰것고 그래도 꼬무락 거려야제 놀먼 못쓰제라.”

“근디 이렇게 힘들어 가꼬야 어쩌실라고요?”

“뭐 그렇다고 다른 방법도 없고...”

 

자식 따라 도시로 갈 수도 없고. 시골에 살면서 논밭이 있고 일이 눈에 보이는데 그냥 놀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일을 하고.

 

오도 가도 못하는 현실이 바로 우리 농촌의 모습인 것 같다.

 

 

열 여덟 번째 이야기 - 어르신의 현실

 

찰동에 가면 좁은 집이긴 한데 트럭도 들어가서 돌려 나올 수 있고, 화단을 정말 멋들어지게 꾸며 놓은 어르신이 계신다. 화순읍에서 사시다가 고향으로 귀향하셨다. 이제는 농사도 많이 줄이고 소일하고 계시는 것 같다. 토방에 놓여있는 나락이 작년보다 훨씬 적어 보인다.

 

“농사를 줄이셨구만이라?”

“잉 그래부렀네.”

“잘 허셨구만이라?”

“자석들이 일허다가 들에서 쓰러지면 테레비 나온다고 해서 그만 둬부렀네.”

“자식들 얘기를 잘 들으셨네요.”

“나가 많으니 들어야제. 자석들 허지 말하는 것은 안허는 것이 좋제.”

“안섭섭허신가요?”

“섭섭해도 고것이 현실인디....”

 

정말 부지런하신 어르신이다. 화단을 꾸며 놓은 것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그런 분이라서 농사를 줄이고 소일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이제는 연세가 들어 힘이 딸리고 자식들 얘기를 들어야 하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도 이 어르신은 자식과의 관게가 잘 풀린 경우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농촌에서 일로 자식들과 티격태격 하는 부모님들이 많다. 자식들은 힘이 들고 아프신 연세 드신 부모님의 일을 못마땅해 하고 부모님들은 조금이라도 농사를 지어서 자식들을 도와주려고 한다. 자식이나 부모님이나 모두 이해가 된다. 부모님이 연세가 많아져 힘이 부치는 것이 문제이고, 도시로 나간 자식들도 가까이서 부모님을 돌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없어 보인다. 어느 한 쪽도 자신의 역할을 쉽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현실이 바로 우리 농촌의 현실입니다.

 

 

2012년 정미소 일이 끝이 났다. 아버지의 정미소 은퇴식 고민을 했지만 아버지가 내켜 하지 않아서 포기하고 있다. 그리고 겨울로 접어들면서 아버지가 뇌경색이 와서 병원에 입원해서 시술을 받으셨다. 이제 아버지는 평생 뇌경색을 막는 약을 드시면서 관리를 해야 된다. 아버지가 원하셔도 정미소 일을 계속하기는 힘들어졌다.

 

쌀집아저씨의 고민도 깊어간다. 정미소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아버지가 평생 해오신 것이라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 주변 농사 짓는 농부들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혼자서 정미소 일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고민이 깊어진다. 올 겨울이 깊어지면서 쌀집아저씨의 정미소 고민도 깊어지게 됐다. 

 

2012년 정미소 풍경을 마무리 한다. 올해 마무리가 백용정미소의 완전한 끝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쌀집아저씨의 고향 농촌의 모습을 정미소를 통해 담아 보았다. 우리 농촌의 현실을 솔직하게 보여드리고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올 한 해도 벼농사 짓느라 고생한 이웃 농부들과 정미소에서 고생하신 아버지, 정미소 일을 도와준 우영이, 그리고 나 쌀집아저씨 한테 정미소 풍경을 바친다.


[이글은 다음카페 거리의미술동호회에 올라온 글을 퍼온것입니다 

원문보기   http://cafe.daum.net/streetart/Pgz/9435 (새창으로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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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집아저씨의 글에 달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정미소에 벽화를 요청하셨는데 광주거미동이 활동이 없는지라 어찌 안타까워만 했는데

이렇게 벽화가 있어서 안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