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97년 '황해미술 제5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벽화는 누구나 볼 수 있잖아요 출근길 요 며칠새로 동양장 사거리에서 연수동으로 향하는 길 옆, 산을 끼고 도는 길이라 산쪽으로 200여 미터가 넘는 옹벽이 있는데 거기에 벽화가 그려졌다. 아니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한20여 미터는 아직 남아 있다. 꽤 길다란 벽이었는데 어느새 다 그려지고 이젠는 조금만 남은 셈인데 어쩐일인지 그만둔 것 같다. 수성페인트로 흰바탕을 한다음 그 위에 유성에나멜 페인트로칠을 했다. 젊은 친구들이 그리고 있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아침 출근길로만 지나가는 길이어서 작업하는 모습을 보질 못해 안타깝다. 그림은 유성페인트의 원색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살린채 그려놓은 인천의 풍경, 파도와 갈매기 등이다. 그동안 보아오던 시멘트 옹벽 그대로의 색상에 비교하면 180도로 바뀌어진 것이어서 눈에 확 띄고 무엇보다 밝은 색상들이 주는 활력이 인천을 상징하는 것 같아 좋다. 좋은 일이다. 신나는 일이다. 거기에 그림이 있어서. 퇴근길 퇴근은 남동공단을 질러 시청 옆을 지나 집으로 가게 된다. 시청 건물은 도로보다 한참이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그 비탈진 언덕배기에는 잔디도 장미도 나문들도 잘 가꾸어져 있다. 6월의 빨간 장미와 7월의 푸른 잔디도 보기 좋지만 그 비탈을 받친 옹벽의 허전함은 안타깝고 애처롭다. 황해시대의 중심인 인천의 시청이 들어선 곳의 벽치고는 많이 모자란 벽이다. 내일 아침 퇴근길에 아마도 나는 그 길을 지나며 미술적 활용이 부족한 그 벽을 힐난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거 나 아니면 안돼,내가 할 자리야 그대로 있어줘'하며 마음 속에는 벼라별 그림들을 그려댈 것이다. 물론 물에 잘 젖고 햇빛이 안드는 뒷면 벽까지 다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거기다가 인천을 상징하는 연작을 그린다면 얼마나 멋진 것이 될까. 아니, 적은 비용이라도 지원해 주고 이곳 인천의 화가, 디자이너에게 분양을 해줘도 훌륭한 문화적 가치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텐데... 출퇴근 뿐만 아니라 내 눈 가는 모든 건물의벽, 공간들은 내게는 다 조형물을 넣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색이라도 칠해 넣거나 해야 할 대상으로 밖에 안보인다. 쉽게 말하자면 내 눈에 벽화귀신이 씌워 졌다는 것인데, 이 또한 살아 있는 즐거 움이다. 해님공부방 벽화 올해 초에 나는 벽화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뭐 거대한 그 무엇이 아니라 그냥 소소해도 일단은 해보는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벽화, 음~벽화를 하면서 지내던 중 2월에 그야말로 눈에 확 뜨이는 좋은 자리를 발견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바로 그렇게 시작된 벽화가 해님공부방 벽화이다. 부평구 십정동에는 해님공부방이 있다. 나는 거기서 지난해부터 초등학생 미술자원교사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공부방은 앞쪽에 작은 공터를 두고 있어 길 다니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은 위치에 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보물(벽)을 해가 지나서야 발견하게 되다니, 벽화를 하겠다고 나선 이상 더 이상 꾸물거릴 게 없었다. 공부방의 환경미화및 홍보, 학생들의 공부방에 대한 자긍심 고취,지역환겨의 개선, 주민에 대한 미술서비스 등을 읊어대고, 거기다가 돈은 기막히게 적게 든다고 순전히 내가 무료봉사하는 거니까 페인트 값으로 오만원이면 할 수 있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기획안을 써내고 결국 교사회의에서 하기로 결정(나도 교사임)했는데 비용은 교사들이 얼마씩 내기로 했다. 물론 작업비용은 그보다 많이 들었지만 그리고 난 후의 효과가 그 이상인지라 아무도 비용초과를 나쁘다 말하지 않았다. 밑그림을 같이 벽화를 하자고 모색해왔던 승우의 작업실에서 열시간을 넘게 입씨름하고 종이와 색연필과 치고받기 한 끝에 밑그림을 만들었다. 지역환경(산동네),아이들의 정서, 교사들의 바램 등을 하나의 장면에 다 넣기로 하고 다층 면분할 색채처리로 마감한 밑그림을 그리자마자 공부방 실무자에게 가지고 갈 때는 얼마나 의기양양했던지... 벽화작업은 일주일 이상을 잡아 끌고서야 마무리되었다. 둘이 하다가 넷이 하다가 또 여러 사람의 도움 속에서 진행되었다. 어떨 때는 하겠다고 달려드는 아이들을 더군다나 네 살짜리 꼬마까지와서 하겠다는 통에 달래느라 애먹기도 했다. 결과보다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릴 때가 참 좋았었다. 작업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찬데 거기다가 잘 그리네 이쁘게 합네 하시는 동네할머니,아주머니, 아이들의 성원으로 기분이 어찌 아니 좋을런가. 어떤 사람은 십정동에 명물이 하나 생겼다고 다분히 나 듣기 좋으라는 소리를 하지만, 명물은 관두고라도 벽화는 해님공부방에 걸맞고 또한 동네에 신선하게 문화적 효과를 주기도 한다 누구에게 벽화가 있어 그 효과를 물어보니 '글쎄요, 하지만 좋은것 같애요,'한다. 명진미용실 십정동 구시장 부근,앞에서 보면 2층 뒤에서 보면 3층인 건물이 있는데 1층에다 미용실을 하시는 남인숙 아주머니(막내인 영균이가 공부방에 다닌다)로부터 건물 뒷면에 벽화를 하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왔다.공부방 벽화를 보니 맘에 들고 자기 네 건물 뒷벽에도 진즉 그렇게 꾸미고 싶었노라고 하셨다. 옥상에 올라가 길이를 재고 높이를 재고 멀찍허니 떨어져서 보며 무얼 그리면 합당할래나 생각중인데 아무거나 이쁘게만 그려 달라고 하신다. 밑그림을 보고서 이야기하자고 해서 새벽에까지 며칠씩 그렸던 밑그림을 여러 개 가지고 갔다. 그러나 막상 밑그림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관건이어서 결국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석달이 지나고 말았다. 여름휴가를 벽화한다고 8월말로 잡아놓고서야 벽화는 시작되었다. 작업 기획안과 밑그림 작업은 이렇게 해야 요렇게 해야 낫다는 등의 말싸움판이 되고 컵라면을 먹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온몸이 녹초가 될 지경에서야 끝이 났다. 밑그림에서 제일많이 논의된 건 미용실에 관한 내용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난간에 미용실 이름과 전화번호가 나오니 그림은 그냥 그림으로 가기로 했다. 사람-아이들, 잠자리, 게, 꽃과 나뭇잎, 물고기 따위가 소재로 등장하고 되도록 거친 붓터치를 살리기로 했다. 또 밑그림에서는 색을 제법 고상하게 설정했는데 막상 본작업에서는 수정되고 말았으니 이는 수성페인트의 성질을 무시한 순전히 파레트식 색이었기 때문이다. 3층 높이의 벽은 벽화하기에 그다지 높은 벽은 아니었지만 그 건물은 밑에 빈터가 아예없이 아파트 울타리와 조경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줄타기 작업과 옥상에서 장대에다 로울러를 끼우고 하는 작업만이 가능했다. 줄과 발판을 빌리고 줄타고 바탕칠 할 사람도 구했다. 줄과 발판을 구하는데서 페인트를 구하기까지 여러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그 덕분에 빨리 작업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드디어 본작업. 3층과 난간의 세가지 색 바탕칠이 장대로울러 작업으로 끝나고 2층벽 바탕칠 작업이 줄타는 사람에 의해 빨리 끝나자 내가 줄을 타고서 3층벽 그림을 그려 나갔다. 마지막에는 코팅제를 덧씌우며 작업은 끝이 났다. 작업중 재밌는 일 둘. 하나는 줄을 타면서 벽화를 그리는 것이다. 바람만 심하게 불지 않는다면 제법 스릴있고 상쾌한 재미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또하나는 주인되시는 분이 멍멍탕을 맛있게 끓여 주신것. 어찌나 많이 주시는지 우리들은 하마 터면 배나온 개구리가 될 뻔했다. 더구나 쐬주까지 먹은 개구리.... 벽화, 환경미술, 공공미술 80년대 나는 민중미술, 현장미술이라는 것에 경도되어 있었다. 전시장에서의 미술을 한낱 소시민적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오로지 민중의 곁으로 미술은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걸개그림, 판화, 깃발그림, 장승만들기에서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그 성과도 눈부신 것이었다고 자부하였지만 세상이 바뀌고(?) 나서는 개인작업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다. 판이 달라졌고 내 조건도 예전과 달랐다. 그리하여 나는 수채화를 전문으로 삼는, 열심히 그림그리고 전시회가 잡히면 전시를 하고 개인전을 꿈꾸는 일이 많아졌다. 전시장으로 그림보러 오라고, 오픈하니까 술이나 한 잔하자고 이리저리 전화 하다가 문득문득 얼마전에는 간다고만 하더니 이제는 오라고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의 현향과 전시장의 편협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이 심해지면서 개인작업이 그저 시들시들하기만 했다. 벽화를 하기로 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 삭막한 공간을 보기좋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심성을 갖게 하는 것, 여러 사람들 속의 미술을 하고 싶었다. 벽화야말고 그 곳을 지나는 누구나 볼 수 있잖는가. 89~91년까지 농촌미술활동으로 벽화작업을 했던 것이 커다란 인상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굳이 벽화가 아니래도 그저 페인트만을 칠할 지언정 장소와 상황에 걸맞는 디자 인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르며 효율적이라는 것, 어떤 조형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미적 문화적 상품이 되기도 한다는 것, 건물 하나라도 미적인 디자인이 그 건물 의 이미지 가치를 높여 준다는 것, 또한 대중의 실생활에 가까이 다가가는 미술이어야 한다는 것, 이런 생각이 내가 벽화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미술 (아직, 명확한 개념정리가 안된 환경미술, 공공미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어찌해야할 바도 모르는 어수선한 사람일 뿐이니 스스로 답답하기도 하다. 인천과 벽화 전국적인 변화이겠지만 이곳 인천에서도 벽화, 공공미술적인 부분들이 들어서고 있다. 1%의 미술이 아니래도 그렇다는 말이다. 아파트는 이제 맨숭맨숭한 외부도장만으로는 안된다는 듯 날로 색채와 디자인이 섬세해지고 있다. 그리고 도심의 상업빌딩에서도 벽화가 보이고 있고 동양화학, 제일제당, 무지개사료 같은 대형공장과 학교의 벽돌에 벽화는 그려지고 있고 또 계속 그려질 것이다. 도시 전체적인 차원에서 거시적 안목으로 환경미술, 공공미술을 기획하고 조종하며 조화를 이루어 낼때 인천의 문화적 가치와 대중의 문화적 감성이 고양되리라 본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과 공공의 미술영역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펼치겠다는 미술가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미술가들을 뒷받침할 공공기관의 역할 또한 중요하며 양자의 관계정립이 절실히 요구될 것이라 본다. 인천은 아직 할 일이 많은 도시다. 그만큼 도전적이며 희망적인 미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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