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만수동 향촌리 철거촌 두 번째 이야기]
인천 만수동 향촌리 철거촌에도 무더위와 여름장마가 시작되었다.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는 전신주가 그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옅은 흔적처럼 뭉개진 폐허위로 서있다.
장맛비는 철거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긴 여름날이 더없이 고통스럽고 힘들게 할 것이다.
그래도 철거촌 아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그리며 환하게 웃음 짓게 만드는 ‘난타 굿’ 장단이
여름날과 긴 장마를 이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철거촌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다은아, 그림 그리기 할까?"
"네 선생님 저는요, 그림 그리는 것이 제일 좋아요."
▲ 그림 그리기가 제일 좋다는 다은이는 벽화 그리는 날도 신이 났었다.
국어는 자신 있지만 수학 점수가 뚝 떨어 졌다고 울상을 짓는 다은이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2학년생이지만
나이답지 않게 밝고 조숙한 아이처럼 보인다.
박향미(민중가수.37)선생님의 말씀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모습과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그늘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다은이는 두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이 각자 떨어져 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할머니 손에 자랐지만,
어르신들의 말씀에는 여느 아이들보다 예절바르게 듣고 답하는 모습과
섬세한 글 솜씨에서 다은이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다.
아이들과 공기놀이를 하시고 색칠하는 것에 흥미를 돋우시고
철거 이후 꽉 닫혀 있던 아이들의 마음을 여는데 참 힘들었다는 속내를 들려주시는
박향미 선생님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지수(가명)는 마음이 닫혀 있는 아이였어요. 전 그 아이가 원래 그런 아이인줄만 알았죠.
말을 붙이기도 힘들 정도였고, 눈을 마주치는 것도 싫어했어요.
오히려 제가 부담이 되더군요."
낯선 사람에 대한 거부반응과 경계심이 많았던 지수였다고 한다.
철거이후 향촌마을에 몇 번 발을 디디고 난타며, 글씨 공부며,
영상공부를 시작한지 몇 달이 되어서 겨우 지수가 환한 웃음으로
선생님을 맞더라며 당시의 어려움을 회고했다.
그 얼굴에 웃음이 너무나 환해서 처음에 보았던 지수인가 의구심이 들었다는
박향미 선생님은 연신 아이들과 친해졌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너털한 웃음에 누구에게나 정감 있게 들릴 듯한 목소리지만,
그가 과거 운동권의 대표적인 노래패 ‘꽃다지’ 초기 활동가였다는 것을 느끼기엔
너무도 평범하고 자상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만수동 향촌마을에 발을 내 딛었던 인연은
노래공연 섭외를 받고 부터라고 말했다.
박향미 선생님은 "아이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어요."말하며
“집을 잃은 슬픔과 고난의 과정 속에서 아이들이 받았을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박향미 선생은 “아이들의 상처는 너무도 깊을 수밖에 없다.”면서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길거리에 쫓겨나온 망연자실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아이들의 눈에 비추어진 세상은 무섭고, 두려운 존재임을 스스로 깨닫게 했을 것이다.”는
생각을 아이들의 얼굴에서 느꼈다고 말했다.
▲ 붉은 페인트로 피를 토하는 듯하던 벽면과 쇠파이프 - 벽화그리기 전 모습
▲ 붉은 빛은 사라지고 아이들의 희망이 그려져 있다. - 벽화그리기 이후 모습
한밤중에 쳐 들어온 용역깡패와 사력을 다해 싸우던 엄마, 아빠들의 모습들과
절규하며 죽어갔던 이웃집 아저씨의 주검을 묵도하면서,
철거촌 아이들의 눈 속에 비추어진 세상은 과연 어떠했을지 아이들의 얼굴에서 짐작케 했다.
살기와 공포 그리고 두려움 가득했던 악몽과도 같던 그날의 기억들은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우리사회가 너무나 큰 생채기를 남겼음은 부끄럽지 않은지
되묻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철거촌 아이들에게 다시금 희망의 꽃씨를 뿌리는 '신나는 문화학교 인천사업단' 내
향촌 철대위 공부방 연구모임이 만들어져 네 분의 선생님이 사비를 털어가며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신나는 문화학교' 는 소외계층을 찾아 문화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지역에서 문화연대를 통하여, 계층 간의 갈등들을 조금 이나마 해소 하고자 만들어 진 단체라고
박향미 선생은 소개했다.
글쓰기를 가르쳐 주시는 최문선 선생님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가장 흥미 있어 하는 수업이라고 했다.
아이들 에게 문화적 체험을 직접 실천하시는 박향미 선생님은 난타를 가르쳐 주시고
향촌리 노래패'불나비'를 만들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또 영화시나리오 구성과 카메라 작동 법까지 가르치는 영상반의 박경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새롭게 그리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이분들이 쏟아내는 열정 속에서 아이들의 생채기는 조금씩 아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박향미 선생님은 난타 수업에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한다고 했다.
취재에 나섰던 날도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과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위한 분위기 쇄신을 위해
철대위 본부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하는 벽화그리기 수업이
지역단체인 '인천희망그리기'의 주관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 검정색 리무진 자동차, 복채로 가득한 돈 주머니, 부자란 글씨 - 아이들의 스케치한 밑 그림
▲ 순진무구한 아이들만이 가질수있는 희망과행복은 그림속에서 왠지 슬프게느껴진다.
벽화 그리기에 들떠 있던 아이들은 매일 밤에 꾸었을 꿈을 하얀 도화지에
스케치하고 벽에는 스케치한 밑그림을 옮기고 있었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붉게 물들어진 벽과 철문은 에메랄드빛을 띄고 있는
연한 하늘색으로 벽과 철문이 점점 환하고 밝은 빛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과 사람들의 옷은 벌써부터 페인트로 얼룩져 있다.
때로은 진지한 모습 속에서도 이마엔 땀방울이 구슬처럼 맺혀 흐리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은주’는 평소 꿈꾸던 집을 그렸다.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며,
너른 들판을 내 달리고 싶은 자신의 생각들을 그림으로 그려 냈다.
‘다은’이는 자신이 키우고 싶었던 강아지와 집을 그렸다.
또 다른 아이들이 돈을 그리고 집을 그리고 은행을 그려 넣었다.
그림은 너무도 아름답다 그리고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마음을 벽화에
그대로 그려내고 있었다.
은주는 어떤 집을 그리고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희 집은요. 지붕도 예쁘고 대문도 모두 예쁜 것으로 만들었음 좋겠어요.
그리고요 집 앞에 화단도 있으면 꽃도 심고, 물고 줄 거예요.”
은주가 정작 필요한 것은 예쁜 집보다 '우리집' 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게 했다.
지금의 쇠파이프로 단단하게 용접되어 갇혀있는 집이 아니라
다시금 예전처럼 오순도순 가족이 함께 모여앉아 사랑을 나누었던 집을,
그림처럼 매일 밤 꾸었던 집을 그렸다.
▲ 은주가 살고 싶다는 집은 너무도 평범해서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정원이 있는 근사한 집도 아니었고 발코니가 있는 전원주택도 아니었다.
하늘을 날카롭게 찌르는 높고 날이 선 아파트도 아니었다.
수진(가명)이가 그린 그림은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을 그렸다.
책속에서 읽었던 오두막집이라도 가족모두가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온돌방을 생각하며 집을 그렸다.
그저 수진이의 작은 소망은 아빠, 엄마 수진이가 살 수 있는 집이면 되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담아서 벽속에 차분히 그려 넣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우리집'을 살 수 도 있고,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아이들 가슴에 멍처럼 가득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은행이며, 만 원짜리 지폐를 여러 장 그린 아이도 있었다.
결국 돈이 없어서 오갈 데 없이 쫓겨난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돈을 그리고 한국은행을 그려야 하는 가슴 저미는 현실임을 숨길 수 없었다.
이날 벽화그리기를 주관한 '인천희망그리기'는 인천지역의 소외계층이 많은 지역의
낡은 건물의 벽면이나 담벼락을 희망의 붓으로 그리는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사회 복지시설을 비롯해 시민단체의 벽화그리기 작업을 수행하는
인천희망그리기 대표 이진우(43)씨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며
"잃어버린 것에 대한 소중함과 그것을 채우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그림이 가슴 아팠다."며
“얼마나 절박했으면 순진무구한 아이들마저 돈을 그려야만 하는 것인지
이곳 철거촌 아이들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하면서
지금은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자신이 10년 전 세입자로 살면서 겪었던
아픈 기억을 잠시 회상 하는 듯 했다.
▲ 만원짜리 지폐 한 장 그리고 한국은행이 뚜렸한 그림.
▲ 아이들의 그림 속에는 돈 주머니와 지폐가 항상 그려져 있다.
철대위 건물에 생활하는 아이들은 공부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씻을 곳도 아퍼도 병원에 한 번 가기 힘들었지만 주변에 있는 뜻 있는 단체들이 나서
이렇게 아이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전하고 있었다.
1층은 어느새 아이들의 공부방으로 환하게 꾸며지고 있었다.
수업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던 공부방은 밝은 톤으로 채색되고,
어두운 저녁에 공부를 해야 아이들을 위해서 새롭게 형광등도 천정에 달았다.
여기에 기증받은 책들도 꽂아 둘 수 있는 책장도 만들고, 아이들이 언제든 보고 싶은
책과 공부도 할 수 있는 책상도 만들어졌다.
이날 세모꼴 투명아크릴로 입구를 만들던 철대위 조직부장은
“아크릴 한 장에 십 만원이나 하더군요. 이거, 세끼 밥 먹기도 힘들어서 어쩝니까?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인데 없는 돈이라도 털어서 이렇게라도 해야지요.”
너무 돈을 들여서 만든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환하게 웃으면서
그동안의 시름을 잠시 잊은 듯 했다.
▲ 칙칙하고 어두웠던 철대위 건물 1층이 공부방으로 화려하게 변신을 하고 있다.
▲ 공부할 곳도 없었던 아이들을 위해서 빈 호주머니를 털어서 공부방을 만들었다.
그동안 이들에게 웃음이라곤 사라진지 오래였다.
돈이 없다는 것이 한스럽게 가슴을 치지만, 짐승처럼 내 몰아 세웠던 그들에게
끓어오르는 분노와 적대심만을 키운 채 버텨 왔었다.
붉은 글씨로 가득했던 피투성이 같은 철대위 건물이 아이들이 그려 놓은
희망의 벽화 속에서 잠시나마 웃음 가득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아직 이들이 돌아가야 할 집은 없다.
그리고 여느 아이들처럼 공부할 곳도 없다.
임시지만 새롭게 단장한 공부방을 보면서, 예쁘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서,
저 아이들의 꿈을 우리사회가 또다시 무참히 짓밟고 빼앗아 간다면
내 아들 딸들에게 우리는 무어라 답해야 할 것인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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