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기식 미술 장식품 넘어 지역공동체에 보탬돼야

언제부턴가 ‘미술’은 부의 상징처럼 인식돼 왔다. 미술은 부자들의 유희가 됐고, 심지어는 부자들의 유망한 투자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중과 멀어져 ‘소외된 미술’의 현실을 다시 대중에게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있다. 바로 ‘공공미술’이다. <진보정치>가 ‘대안의 삶을 찾아서’ 일곱 번째 순서로 주민과 함께 소통하며 공공미술을 통해 지역공동체 복원에 나선 이들을 만났다.

 

“재개발지역인데 왜 그림을 그려요?”

인천 부평구 십정1동에 들어서면 수많은 벽화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공공미술 작가모임인 ‘거리의 미술’ 대표인 이진우 씨 등 여러 미술가들이 지난 2002년부터 이곳의 벽이나 계단 등에 벌이고 있는 공공미술 ‘열우물길 프로젝트’의 작품들이다. 

인천 부평구 십정1동 일대는 재개발 예정 지역이다. 지난 1970년대 서울과 인천의 철거민들이 이곳에 옮겨와 마을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까진 지신밟기, 단오제를 주민들이 직접 열 정도로 마을 공동체문화가 살아있던 곳이다. 하지만 20년을 넘게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오히려 집도 사람도 허물어져갔다. 젊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재개발 열풍에 외지인들이 집을 사면서 빈집은 늘어갔고, 마을은 방치됐다. 하지만 지난 2002년부터 진행된 ‘열우물길 프로젝트’로 마을은 활력을 얻었다. 올해도 지난 5월과 6월 10개 팀의 봉사단이 참여한 가운데 벽화 작업이 진행됐다.

“아저씨, 여기 곧 재개발된다는데 뭐 하러 그림을 그려요?”

이진우 ‘거리의 미술’ 대표가 재작년 여섯 번째 ‘열우물길 프로젝트’로 벽화를 그릴 때 지나던 초등학생이 던진 질문이다. 그는 지금도 이 말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질문은 곧 이 대표가 이곳에 벽화를 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곧 허물어질지도 모르는 곳이지만 아직 그곳엔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곧 허물어질 곳이라곤 하지만 아직 사람이 살고 있어요. 허물어질 이곳에 벽화를 그리는 게 무슨 의미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곳일수록 가꿔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엔 희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대표는 자신이 그린 벽화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희망을 주민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도 ‘열우물길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자기네 집 벽도 꾸며달라며 이러저런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열우물길 프로젝트를 매년 진행하고 있습니다. 훼손된 작품을 고치고, 주민들 요청에 따라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도 하죠. 주민들이 작품 제작에 함께 참여하기도 합니다. 벽화 제작뿐 아니라 고장난 텔레비전과 전기기기를 수리해주는 등 혼자 사는 노인들을 부모처럼 챙기며 그들의 이웃이 되려고 합니다.”

서울 망원동에서도 비슷한 작업이 추진됐다.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된 ‘예술로 일촌맺기’ 사업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조호연 씨를 비롯한 ‘떳다 예술방’ 소속의 작가들이 참여해 만든 꽃밭주택이다. 꽃밭주택은 방 하나에 화장실을 공용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벌집주택에 붙여진 새로운 이름이다. 회색빛의 낡은 시멘트벽엔 갖가지 꽃들이 그려지면서 마을의 명물로 탈바꿈했다. 주민들도 새로운 공간 창조에 동참했다.

이 밖에도 동네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공방인 ‘동네목공소’, 초등학생들이 자기네 마을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동네탐정단’을 꾸려 활동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예술로 일촌맺기’ 사업은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공모로 이뤄진 사업이지만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공모사업이란 한계를 극복하고 공공미술의 성과를 이룬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한 조호연 씨는 “어려운 여건에서 잘 진행한 사업이지만 아쉬움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우리의 목적은 예술로 공동체를 만들고 복원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쉽진 않죠. 서울시에서 지원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4개월이 지나 주민들과 얼굴이 익을 때쯤 사업을 마감해야 했어요. 서울시에 다시 요청해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으로 2년 동안 사업을 연장했지만 여전히 시간도, 내용도 부족했습니다. 제가 주관적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겠다고 방식을 설정한 한계가 있었죠. 소통한다곤 했지만 결국 소통이 부족했습니다.”

 


관 주도 공모형 공공미술의 한계

조 씨의 고민은 공공미술이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공공미술 공모가 줄을 잇는 등 공공미술 바람이 불고 있다. 하지만 내실은 부족하다. 망원동 사례에서 보듯 주민들과 소통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못하고 정해진 기간 안에 결과물을 내놔야 하는 만큼 보여주기 사업에 그칠 공산도 크다. ‘열우물길 프로젝트’처럼 긴 시간을 두고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찾기 힘들다.

미술 장식품에 치우친 현실도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공공미술(Public Art)’이란 말은 영국의 미술비평가인 존 윌렛이 1967년 쓴 「도시 속의 미술」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는 미술작품을 직접 구매하는 사람들만이 즐기는 데서 벗어나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공공미술이란 개념을 제안했다. 우리나라에선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에 건축물 설치비용의 일부를 미술작품 설치에 의무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기면서 활성화됐다. 이제껏 전시장에 갇혀있던 미술 작품이 거리로 나오는 등 의미가 없진 않지만 공공미술이라 부르기엔 여전히 부족한 게 많다.

“그동안 미술은 유한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어요. 난 농사꾼의 아들이고, 우리 형제들은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하는 미술이 이들의 삶과 동떨어질 순 없지요. 공공미술은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실현하는 미술입니다. 작가의 일방적 행위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죠. 어쩌면 미술이 원래 가야할 길을 찾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거리의 미술’ 이진우 대표는 ‘공공미술’의 의미를 “미술이 가진 본래적 의미를 찾아가는 작업”이라며 “작가의 일방적 행위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최근 공공미술이란 말이 혼란을 겪고 있다. 미술 장식품과 공공미술은 엄연히 구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이어 “지자체의 지원으로 이뤄지는 사업처럼 공모를 내고 누군가 응찰하고, 돈을 받아 언제까지 완성하는 식의 사업으론 한계가 많다”고 덧붙였다.

이런 식의 공공미술 사업은 또한 일회성이란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공공미술로 제작된 벽화 등이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돼 흉물스럽게 변해버리기도 한다. 지역사회와의 소통은 사라지고 보여주기식 사업으로 흐르고 있다.

조호연 씨는 “모두들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공공미술은 지역과 동떨어지지 않고, 지역과 함께 소통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공공미술은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미술은 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커뮤니티 디자이너’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통의 공공미술 실험은 계속된다

서울 망원동에서 ‘예술로 일촌맺기’ 사업에 아쉬움이 많았던 조 씨는 최근 새로운 작업을 벌이고 있다. 올 초부터 그는 서울 도봉구 방학2동에 있는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하고 있다. 조 씨는 지난 2010년 도봉시민회,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 등이 모여 만든 동북시민학교에서 주민들과 함께 버려진 가구로 마을의 평상, 의자 등 공공가구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 주민들의 반응이 좋아 방아골복지관은 조 씨에게 3년 정도의 장기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공동체를 만들고 주민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활동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관의 지원을 받는 사업은 시간도 부족하고 한계도 많았습니다. 복지관에 고용돼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어요. 지금은 우선 주민들을 만나며 소소한 사업들을 진행하며 준비하고 있죠. 이런 작업이 바탕이 돼 하반기엔 본격적인 사업을 기획해볼 예정입니다.”

제주 표선면 가시리에서도 의미 있는 시도가 펼쳐지고 있다. ‘가시리 신문화공간 조성사업’이다. 지금종 가시리 신문화공간 조성위원회 프로젝트 매니저(전 문화연대 사무총장)는 “가시리 신문화공간 조성사업은 농촌 마을의 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데 예술이 기여하자는 생각과 지역의 다양한 문화자원과 역사자원을 예술이 나서서 발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구상을 바탕으로 가시리엔 ‘디자인 카페’, ‘문화학교’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지역의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한 영상·방송교실도 운영되고 목공예교실과 가시리마을밴드, 타악동아리, 지역주민이 강사로 나서 ‘약초기행’도 꾸려졌고, 목축박물관과 문화센터도 설립했다. 특히 공공미술과 관련한 작업은 ‘창작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소통’이다.

지금종 매니저는 “심사를 통해 작가들을 창작지원센터에 입주시킨다. 마을과 소통하는 작업에 우선순위를 두고 심사를 했다. 그동안 공공미술이 시각적 환경미화에 머무르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공공성 강화는 진보진영의 오랜 화두다. 공공성은 사회경제적 의미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실현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미술은 진보진영에게도 중요한 영역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이 공공미술 활성화를 위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문도 많다. 조호연 씨는 “공공미술은 지역과 소통 없이 누군가 주도한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미술가들만이 책임질 문제도 아니다. 미술가, 학자, 지역주민 등 다양한 이들이 참여해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며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영이 그런 창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진우 대표는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영이 재개발 정책의 폐해를 적극 알리고 개선해야 한다는 주문과 함께 “공공미술이 활성화되려면 지역과 결합도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그 동네에 뿌리를 내리고, 함께하는 사업이어야 한다”며 “지역에서 그런 사람을 발굴하고, 찾고, 관련 정책을 기획하는 등 진보진영이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진보진영이 공공미술을 지역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종 매니저는 “중앙과 지방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지역을 볼 필요가 있다. 지역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고, 경제이기도 하고, 문화이기도 하다. 공공미술 등 공공예술이 그런 의미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진보정당이 지역의 대안을 마련하는 차원에서라도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종술 기자 jsgweon@kdlpnews.org
<진보정치 5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