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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미술시평(8) 민중미술이 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왕거미지누 2013. 8. 9. 16:52

윤범모 미술시평 

(8) 민중미술이 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미술대 강의실에서 질문한다. “민중미술이 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손을 드는 학생이 없다. 아니, 뭐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느냐는 표정들이다. 오늘의 미대생들은 정말 민중미술에 대하여 아는 바 별로 없다. 민중미술(Minjung Art), 벌써 잊혀진 과거인가. 20세기 세계미술의 역사에서 한자리를 뚜렷하게 차지하고 있는 민중미술 운동, 어찌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역사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그동안의 경험에 의거, 나는 외국에서 우리의 민중미술 관련 강연할 때 가장 커다란 박수를 받았다. 외국의 청중들은 우리의 민중미술 운동에 대하여 감동과 함께 찬탄을 보낸다. 어떻게 미술이 현실과 결합되어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역할을 할 수 있었느냐는 부러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1980년대는 암흑의 시대였다. 그런 가운데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대학살은 시민의 잠자던 의식을 일깨웠다.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은 더욱 강렬한 저항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높이게 했다.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미술가들 역시 동참했다는 점은 특기사항이다. ‘현실과 발언’ 창립전의 금지조치는 민중미술의 상징적인 서막이었다. 이후 많은 미술가의 작품이 전시장에서 철거되거나 압수되었고, 또 감옥에 가는 미술가들도 생겼다. 정말 목숨을 내놓고 저항하는 시대의 미술 활동이었다. 민중미술 운동은 여태껏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유미주의의 안일함을 걷어차게 하면서 거친 현장으로 나가게 했다. 서구 사조의 눈치를 보면서 삶의 현실과 무관한 작업을 하던 이른바 모더니스트의 음풍농월을 질타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결국, 민중미술 운동은 인권운동을 비롯하여 통일, 노동, 여성, 환경운동 등과 결합하여 사회와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주체적 시각에서 미술 활동을 하게 했다. 한국 미술사에서 근대와 현대의 시기 구분은 민중미술 운동이 하나의 척도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민중미술 운동이 전개되기 이전단계인 1970년대까지를 근대미술기로 볼 수 있다. 나의 이러한 주장은 이제부터 본격적 연구대상일지 모른다. 
미대생조차 민중미술에 대하여 잘 모르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전시 하나가 개최되었다. 광주시립미술관은 민주, 인권, 평화의 키워드를 내세우고 ‘5월 1980년대 광주민중미술’ 전시를 마련했다. 이 전시는 광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민중미술가들의 관련 작품을 집대성한 것이다. 문제는 5.18 이후 30년이 훨씬 넘어서야 이러한 전시가 처음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아니, 광주민중미술 전시가 처음으로 기획된 전시였다고? 놀라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전시장은 1980년대를 재현한 듯, 열기로 가득했다. 특히 거대한 걸개그림이 관객을 압도했다. 그 가운데 <작살판(홍성담 등 광주시각매체연구회 제작, 1986)>은 런던의 엠네스티에서 빌려 온 걸개그림이다. 엠네스티는 옥중의 홍성담을 위하여 역할을 한 바, 그런 인연으로 문제의 걸개그림을 보관하고 있다. 강연균의 <하늘과 땅 사이(1981)>를 비롯하여 신경호, 박석규, 이사범, 김경주, 박문종, 송필용 등의 회화작품, 홍순모, 나상옥, 이기원, 김홍곤 등의 입체작품, 홍성담의 5월 판화 연작 등 눈길을 끄는 작품이 많았다. 특히 80년대 당시 제작된 각종 자료, 흥미로웠다. 5월 광주는 민주화 운동의 현장이었다는 상징성이 매우 크다. 이 때문에 광주시립미술관은 작품 구입정책에서 여타의 미술관과 다르게 민중미술작품을 비중 있게 구입한다. 이는 곧 이 미술관의 성격을 의미한다.
마침 광주시립미술관은 전국시도립미술관 네트워크 하정웅컬렉션 특선전 ‘기도의 미술(2013.6.12-7.21)’ 전시를 함께 개최하고 있다. 이 전시는 국내 공립미술관 순회전인 바, 그동안 보기 어려웠던 이색적 사업이기도 하다. 그동안 하정웅은 1만 점에 가까운 작품을 국내 미술관에 기증하여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그의 기증작품 가운데 재일 동포 화가들의 작품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기증작품 덕분에 우리는 조양규, 송영옥 등과 같은 작가의 명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증언 부분의 작품은 민중미술과 연계되어 리얼리즘 미술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기도 했다. 민중미술은 계속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전시의 하나라고 믿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의 미대생에게 질문을 계속 던지게 한다. “민중미술이 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원문보기] http://www.daljin.com/?WS=31&BC=cv&CNO=367&DNO=10863


사진을 보니 전남대에서의 무슨 집회인가 본데 

저정도 모인 인원과 저 그림을 생각하자면 나역시 저자리에 있었다

무슨 행사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문익환목사님이 오셔서 연설하셨는데

정말 말씀을 잘 하셨다 몰입도 짱!!


이걸개그림을 그린 전대그림패마당, 울학교인 조대미술패 개땅쇠, 호대미술패 00 이렇게 

세학교의 미술패가 연합하여 남미연(전남지역대학미술패연합)을 만들었고 

첫 공동책자를 발행했을때 내게 민중미술운동 탄압의 역사를 기고 해달라고 해서 근 보름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죽쳤던게 생각난다. 내가 조대미대 4학년 동안 도서관은 이때 처음 가봤다. 

곧 졸업직전이었는데 ㅎㅎㅎㅎ


천에 유성도료- ㅋㅋㅋㅋㅋ

그렇다 . TC난 안감용 천에 에나멜페인트로 걸개를 그렸었다. 

에나멜페인트의 끈적거림을 없애기 위해서 가세인(호분)가루를 섞어가며 칠했었다. 

그리고 이런 그림은 펼쳐놓고 그리는 게 아니라 

천을 조금 펼쳐서 그리고  또 말아가며 그리는 것이라서 한꺼번에 전체를 보며

수정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면 에나멜페인트를 천에 칠하면 뒤로 배어 나와서 

공중에 띄어놓고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졸업후 서울의 미술패의 작업을 하면서 캔버스라서 놀랬고 

바닥에 놓고 계속 수정할수 있어서 좋았던게 생각난다. 


민주화를 위한 민중의 열망을 미술로 담은 시대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작업을 한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에서 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관련 주제전시가 

역시 그렇다. 

미술이 사회를 벗어나는 순간 그건 놀음일뿐이겠지.

미술은 언제나 우리사회를, 그 사회의 자신 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