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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간지 -삶글]에 실린 원고 (2001)

왕거미지누 2006. 10. 6. 01:17

아래의 글들은 문학계간지 삶글 2001년 여름호에 실린 글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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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1977-


중학교 1학년때 하복시절에 쓰던 노란 교모가 있었다.
가벼워서 골프공을 던지고 받는 놀이하는데 쓰이는 글로브로 딱이었다. 친구 병국이랑 공을 하늘높이 던지면 받고 던져주고 받고 그랬다. 그렇게 공을 던지고 받는 중....
'혹시 이렇게 즐거운 시간이 어쩌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여전히 즐거운 시간이어서
여전히 나는 꿈속에 있는 건 아닐까?.....

-아부지와 그림:1984-


때는 여름.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이는 한여름의 들녁.
아부지는 논에서 벼에 농약을 치는 중이셨다.
여름방학이라고 집에 내려와 있는 나는 아부지가 농약을 치는 논 옆 새다리 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젤을 펼쳐놓고 파레트는 돌 위에 얹어놓고 흐르는 냇가에 발을 담그고 새다리 밑 그늘의 시원함을 만끽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급지석을 바라보며 산과 나무와 냇가에 닿은 빛의 흐름, 색들의 흐름을 그리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부지는 저리도 고생하시는데 자식인 나는 뭐하고 있는 걸까?' 의문이 일었다. 과연 이렇게 그리는 그림은 아부자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내가 그림으로 출세해서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 드릴것도 아닌데...
농약을 치고 난 후 머리가 심하게 아파 왔다. 두통이었다.

-무작정 상경기:1989-


졸업을 하고나자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일단 서울로 왔다.
내의 두어벌과 겉옷 두벌, 책 세권과 일기장만 들고 이모네집으로 갔다.
그리고 며칠간을 구로공단과 대림역 문래역 부근을 걸었다. 취직을 했어야 했었다.
문래동에 있는 압출공장에 갔었고 구로시장에 있는 미싱 마찌꼬바에도 갔었다. 기숙사가 있다는 말에 덜렁 그럼 가방을 가지고 오겠노라고 말하고서 나서는 길, 온 김에 전화 해볼까하고 전화를 건 곳이 (미술운동집단) 가는패 사무실이었다.
'여기서 가깝네 00초등학교 앞으로 와!'
00초등학교 앞 벌집골목 안 그 벌집 지하에 가는패 사무실이 있었다.
'그런곳(미싱공장)에 취직하면 일단 3년은 그곳에서 썩어야 니가 뭔가를 할 수가 있어. 하지만 우리와 함께하면 바로 니가 원하는 미술을 할 수 있어. 먹고 자는 것도 여기서 하면 돼'
원하던 미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바로 그날 이모집으로 가서 가방을 챙겨서 가는패 사무실로 들어갔다.
같이 자던 형들은 파업지원 프로그램에도 나갔고 미술강습도 했었다. 그 속에서 나도 따라다녔고 뿌뜻했다. 그리고 회의시간이면 말을 제법 하게 되었다.

-서미련:1989~1991-


가는패는 이후 대중조직과 동원조직의 이분법을 가진 서울민미련으로 바뀌고 노동현장에, 노동자 미술강습에, 민주노동행사에 시각매체로 참여하고 전민련의 행사등에 걸개그림과 선전물을 만들고 외대에 벽화를 제작하며, 자체의 전시회를 기획 추진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을 왕성하게 하였다. 전철 패스 하나면 서울이 다 울동네 같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 잡혀갔다. 설마 했었는데 미술가마저 잡아가는 노태우 정권말기의 몸부림에 한순간 다들....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보다가 낌새가 이상해 낙원상가 쪽으로 (도망) 나가는 길에....

-밀감그림과 수채화:1991~1992-


서울구치소, 운동장은 아주 작고 좁았다.
그리고 독거수들은 혼자서 그 좁은 운동장을 빙빙거리며 돌기만 했는데 가지고 나간 밀감, 먹고난 후 껍질을 벽에 문질렀더니 그려지는 것이었다.
와우~~!! 그려지다니! 무척 신나는 일이었다. 밀감 알맹이로 그리면 더더욱 자연스럽게 빠른 필치의 그림이 나왔다. 독거수 운동장에 들어갈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上층에 들어와 있던 전교조 이수호 선생님이 그림이 있어서 좋았노라고 했다. 그린 것만으로도 신나는데 호평까지 받다니....
그해 겨울 서울구치소 운동장 벽에는 온통 낙서그림으로 가득 찼다. 민중이 큰 눈 부라리고 노태우는 무서워서 쫄고 있고 아니면 재소자가 교도소장을 혼내주는 뭐 단순하고 유치찬란한 그런 그림이었다.
그리고 1심에서 형을 받고 2심을 받기위해 간 안양교도소.
간 날부터 작심을 하고 뒤집어 졌다.
신문구독료를 냈는데 신문을 안준다. 점심을 늦게준다. 운동을 해야겠다.....
그리고는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 지금의 아내에게 물감과 스케치북과 붓, 파레트를 넣게 하고는 그림을 못그려서 죽겠다는 둥 화가가 그림을 못 그리니 입안에 가시가 돗힌다는 등 26일간에 걸쳐 입방거부, 관식거부, 면담하기..등등, 덕분에 그곳 생활이 무지 풀렸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운동을 하고 이방저방 다니며 밥먹고 술을 담가 먹거나 회합하거나 (음주가무였음) 학습하는등 참으로 부산을 떨었다. 덕분에 서울구치소처럼 운동장 담벽에 그림그리는 일은 하지 못했다. 운동장에선 농구하기에 넘 바빠서 도무지 짬이 안났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수채화도구가 지급 되는통에 즐거운 시간이 줄어 들었다.
바쁜틈에 그래도 한가지 생각은 했다. 나간다면 원칙을 갖고 살자.
<생존.창작, 활동>의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먹고살아야 한다.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무얼 해도 잠시 일뿐이다. 일단 살 수 있는 벌이를 하고 나서 창작을 하고 활동으로 외화시키자라는 거였는데 지금도 이 원칙은 유효하다. 물론 이 셋이 하나로 풀리는 거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

-벽화농활, 거름붓이 생기고....:1989-


신촌에 있는 문화마당 건물 뒤에 방 하나를 쓰는 대동굿공동체가 있었다. 여기서 문화농활을 기획했고 어쩌다 그 농활에 참석하게 되었다. 농활을 가기 바로 전날 몇사람을 만났으며 가서 무얼 할지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전남 영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인사하며 미술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도착한 영광 가톨릭농민회 사무실에서 벽화와 깃발을 제작하기로 합의하였는데 아무도 벽화를 해본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걸개그림을 해본 내가 걸개그림처럼 하자고 했다.
페인트가게에 가서 페인트를 샀고 농민회측에서 원하는 그림은 만화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즉석에서 슥삭슥삭 스케치를 해보였다. 아무것도 몰라서, 경험이 없어서 다들 페인트 하나에도 신기했고 신나와 섞여진 페인트에서 수채화 효과가 나는 것도 신기했고 그려지는 그것이 그것을 보는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리는 우리도 신선, 신기했었다. 벽화를 두 곳에 했었고 깃발그림도 그렸다.
쉬는 날 법성포 부근 산에서 그네타고 놀았고 이날 같이 간 승우의 생일이어서 생일파티도 했었다. 소풍같은 날이었다.
결국 우리들은 거름붓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고 이후에도 벽화농활을 다시 갔었다.
영광농활을 다녀와 다시가는 벽화농활, 가는패에서 가는 경북 청송. 걸개그림도 그리고 깃발도 그리고 벽화도 그렸다. 벽화를 그릴것인지 말것인지 마을사람들이 자체의 투표를 했다는 사실은 난중에 TV에 나와서 알았다.

-거리의미술, 거미동:1998~2001-


그냥 내 개인 창작보다 벽화를 하겠다고, 사람들의 생활 속에, 거리에 있는 미술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 후 인천 십정동의 해님공부방에 벽화를 하였다. 같이 벽화를 모색하던 승우와 함께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십정구시장 부근 건물 벽화를 하고서 같이 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알음알음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그러다가 넷이 모여 한 팀이 되었다.
IMF가 터진 그 시기에 만났기에 우리들의 작업이 조금은 암울하다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니었지만 정말 우린 하고자하는 마음만 가득했을 뿐 더 이상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부평구청으로 벽화 공공근로 의뢰가 와서 더 많은 이들이 한 팀이 되어 남구청에서까지 이어가며 인천시내 많은 곳에 벽화작업을 하였다.
지금도 공공근로로 벽화작업을 하고 있다. 실업극복 인천본부와 함께 인천의 곳곳에 벽화가 필요하는 곳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올해 했던 벽화와 또 시각매체 기획작업 등이 얼마나 되는지 손꼽으려면 한참 걸린다.
더구나 인터넷의 거리의 미술동호회는 역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전국에 함께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소식이며 움직임이다. 인터넷 동호회지만 자원봉사 벽화작업을 여러번 했고 지금도 하는 중이다.

가봐야겠다. 은옥이가 뜨블거리겠다.
군부대 담벽에 들어갈 벽화 밑그림을 같이 해야하건만, 이놈의 글을 쓴답시고 끙끙이고 있으니 틀림없이 꿍시랑거리겠다. 핑크도 같이 그럴라나..아니겠지..
저녁같이 먹을거냐고 전화한 중전, 작업실에 여럿같이 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중전과 두공주에게 미안하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잘 해준것도 없이 맨날 바깥이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여전히 즐거운 시간이어서
여전히 나는 꿈속에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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